고귀한 선물
고귀한 선물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5.29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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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효문화실천 글짓기 공모 금상작
김 예 린 <청주 대성고>

종이상자와 돈을 보면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항상 아침마다 중앙공원에 가셔서 윷놀이를 즐기신 후 꼭 종이상자를 모아 오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치매라는 병에 걸려서 이러한 행동을 계속하셨다. 가족들은 할아버지의 병 때문에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쌓이는 종이상자에 불평을 하였다.

할아버지는 생활하시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가족들이 생활비를 드리는 데도 계속 돈에 집착하셨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젊으셨을 때 가난때문에 서러웠던 것을 종이박스를 모아서 팔고 돈을 모으시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셨다. 엄마의 말씀을 들었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치매로 인해 돈에 집착하는 행동이 심해지시면서 그 피해는 가족들에게도 고스란히 왔다. 하루는 은행에 가셔서 자신이 계산한 돈과 은행에서 계산한 돈이 일치하지 않는다며 은행원에게 매우 화를 내셨고 결국은 가족들이 은행에 가서 할아버지를 모셔왔다. 가끔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는 돈 문제로 싸우셨다. 그때마다 할아버지와 싸우신 후 집을 나가신 할머니를 찾기 위해 할아버지는 우리집을 찾으시곤 하셨다. 아무런 예고없이 우리 집에 오셔서 할머니가 어디에 있냐고 하시며 큰 소리로 화를 내실 때마다 친구와 놀고 있던 나는 친구에게 미안하고 창피했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할아버지를 원망하고 할아버지를 피해 도망가신 할머니 또한 원망했다.

우리에게 그렇게 미움과 원망의 대상이 되셨던 할아버지지만 바깥 출입이 자유로울 만큼 건강만은 정정하셨다. 그러던 할아버지께서 병원에 입원하실 만큼 건강이 악화됐다. 할아버지는 병원생활과 병 때문에 힘들어 하시면서도 돈에 대한 집착은 계속되셨다."죽을 때도 돈 가져 갈거유"라며 고모할머니는 원망어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치매에 걸리신 할아버지는 점점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하셨지만 돈에 대한 집착은 여전하셨다. 할아버지의 병이 악화되어 안타깝고 가슴이 아팠었는데 돈만 좋아하시는 것을 보니 할아버지가 더 원망스럽고 섭섭했다.

이런 생활이 하루하루 지나가고 어느날 의사선생님께서"이제는 마음에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가족들이 많이 힘들고 고생하는데 차라리 할아버지께서 좀 더 일찍 돌아가시는 것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매번 다투셨던 할머니는 좋아하시지 않고 오히려 힘없이 주저앉으셨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이 시각 병실에 혼자 계시던 할아버지께서는 병실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쭈뼛쭈뼛 서 있던 나를 지그시 바라보시며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리셨다. 가족들을 아무도 알아보시지 못하셨는데 왠지 그 모습을 보니 나를 알아보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아무 말씀 없이 그날 저녁 눈보라가 치는 새벽 할아버지께서는 저 높은 하늘로 가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평소에 쓰시던 물건을 정리하는데 장롱 깊숙한 곳에 낯익은 모자 하나가 나왔다. 내가 할아버지 생신 선물로 드린 털모자였다. 그런데 그 안에는 꼬깃꼬깃하게 모아져 있는 돈이 들어있었다.

할아버지께서 "평소에 그렇게 돈을 모으시더니 다 널 위해 그러셨나보다. 이 돈은 네 몫인 것 같구나"하셨다. 평소 못되게만 굴고 서운하게만 해 드렸던 손녀를 위해 용돈 몇 푼 주시기 위해 그 꼬깃한 돈을 모으신 거였구나. 나는 눈에 눈물이 핑돌았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일찍 깨닫고 살아계실때 더 잘해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너무 후회된다.

깨달음은 늘 한 박자 늦게 후회와 어깨를 걸고 찾아오는 듯 싶다. 보이는 사랑보다 보이지 않는 더 큰 사랑을 가르쳐주신 할아버지의 마음은 고귀한 선물이다. 한가로이 흰 구름이 떠가는 하늘엔 하얀 머리칼로 세상을 고집스레 살았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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