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 한장
엽서 한장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5.28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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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련
김 영 미 <수필가>

엽서를 받아든 내 손이 가슴보다 먼저 떨린다. 휘황찬란한 야경의 런던 브리지를 배경으로 한 엽서다. 발신인도 없이 서울 광화문우체국 스탬프가 찍힌 짤막한 사연이다. 해설하는 모습이 퍽 단아하고 인상적이었단다.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찾아갔던 추억이 생각난다며 고마움의 표시로 엽서를 보낸다고. 수신인의 주소도 이름만 정확하게 내 이름일 뿐이지 번지수도 모르는지 그냥 ㅇㅇ문화재단지라고만 적혀 있다. 어둠 속 수많은 불빛들이 내 안에서 동요하기 시작한다.

문화관광 해설사라는 일을 하다 보니 종종 감사의 이메일이나 편지를 받는다. 그럴 때마다 힘들긴 해도 내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 이번 엽서는 달랐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짐작 가는 사람이 없다. 무슨 단서라도 찾고 싶어 엽서를 코에 대보지만 아무런 체취도 흔적도 없다. 그날부터 나는 그 엽서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뒤지고 짐작 가는 사람들을 손꼽아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혀 짐작 가는 사람이 없다.

매일 아침 이메일을 연다. 메일 ㅇㅇ통 하고 뜨면 벌써 마우스를 쥔 손이 급해지면서 가슴이 설렌다. 메일이 열릴 때 3초의 행복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나는 이 행복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기 위해 될 수 있으면 천천히 메일을 연다. 성격 급한 내가 하는 유일한 느린 행동이다. 메일이 열리면 먼저 아는 아이디를 클릭한다. 그 다음 낯선 아이디를 연다. 낯선 아이디에서 감사의 메일이라도 받는 날은 하루 종일 두둑한 지갑을 지닌 사람처럼 든든하다. 그런 다음 다시 스팸메일과 광고메일을 지운다.

통신매체가 발달한 요즘 주로 이메일이나 휴대폰의 문자 메시지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편지를 써 본 게 언제던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손으로 꾹꾹 눌러 쓴 편지나 엽서를 받는 날은 춥고 긴 겨울을 보내고 피는 봄꽃을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즐겁다.

발신인도 모르는 엽서를 들고 다니면서 시간 날 때마다 들여다 본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행복한 기분은 여전하다. 가슴에 꼭 안아 본다. 따스하다. 그림에서 풍기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엽서를 보낸 사람의 마음 때문이다. 누가 보냈는지 굳이 알고 싶지 않다. 아니 알고 나면 실망스러울까 봐 애써 알고 싶지 않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계절이 바뀌면서 왠지 모를 우울함에 빠져 참 많이도 힘들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엽서 하나에서 나의 작은 흔들림이 많은 위안이 되었다. 여행 다닐 때마다 사서 모아 두었던 엽서를 꺼냈다. 나의 이 행복감을 누구에게든 전파하고 싶은 생각에 그림을 먼저 고른다. 그리고 떠오르는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또박또박 적는다. 발신인란을 비워두기로 한다. 눈치 빠른 친구는 짐작을 하리라. 또 나처럼 아둔한 사람들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젖을 행복감에 벌써부터 가슴이 콩닥거린다. 글을 쓰는 내내 그리운 친구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내가 받은 기쁨을 친구들에게 나눠 줄 수 있음이 또 다른 행복이다.

떨리던 손은 멈추었는데 내가 받은 엽서는 아직도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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