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섬 가는 길’을 따라서
'꽃섬 가는 길’을 따라서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5.16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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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채화의 문학칼럼
한 채 화 <문학평론가>

며칠 전 습관처럼 일찍 깨었다. 그러나 전날의 과음으로 무거운 머리를 다시 베개에 묻었다. 그리고 한참동안 더 이부자리를 짓뭉개고 나서야 일어나 늦은 아침을 먹고 서울로 향한다. 뜨락의 목련꽃 진 자리에 바람이 잠시 머물러 있다가 흔적을 남기고 사라졌다.

인사동은 늘 사람으로 넘쳐나는 곳이다. 그런데 연휴에 좋은 날씨마저 거들고 나서니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나는 그림 잘 그리는 여림(與林) 신동호 화백의 '꽃섬 가는 길' 전시회장을 찾아 가느라 그 많은 사람꽃 속에 묻혔다.

전시회장인 경인미술관은 골목 안쪽에 있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마당을 들어서보니 매우 아늑해서 바람마저 머무르고 싶은 곳이었다. 마당에 놓인 몇 개의 의자도 고스란히 햇볕에 젖어 있었다. 마당에 앉아 한담을 나누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제 3전시장으로 들어가니 신화백이 반긴다. 조금은 수척해 보이는 모습에 전시회 준비로 애쓴 것을 알 수 있다. 손을 꼭 잡았다.

전시 작품의 소재는 주로 꽃이었다.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꽃이 아니라 잉태를 위한 가련한 몸짓이다. 그러한 꽃들이 바위 속으로 들어와 박혀 있다. 딱딱하고 어두운 가운데에 부드럽고 화려한 꽃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만남이 곧 잉태이며 이런 위에 나그네는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먼 길로 눈길을 둔다. 어쩌면 무릉에서의 일박을 날마다 꿈꾸고 있다고 이해하였다. 도화 흐르는 곳 거슬러 오르니 별천지가 거기에 있다지만 그림 속에 별천지가 있었다. 먼길 돌아 닿는 꽃섬에는 아마도 도화가 만발했을 터이다. 신화백이 찾아 나선 그곳은 어쩌면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곳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더 버려야겠다고 한다.

전시장을 나서며 집어든 소책자는 뜻밖에도 화시집이었다. 신화백의 그림을 본 김병기 시인이 자신의 감성으로 그림을 받아들여 시편으로 재생산한 것이다. 물론 간혹 시화를 동시에 전시한 경우를 보았지만 대개는 시를 위한 그림이거나 그림을 위한 시이었다. 그런데 이번의 경우는 그런 유와는 달리 그림을 완전히 해석해서 시인의 성향에 따라 시로 재구성하였다. 독특한 체험이었다.

자신의 몸이 동그랗게/말린다는 것은/외로움 때문이다//돌이 물로 둥글어지는 것은/스스로를 버리기 때문이다//날마다 내면을 바라보고/둥글게 마음을 닦아내야 한다//별들이/수억 광년을/修身했으므로/둥근 빛을 내는 것을('둥글-ㅁ'에 대하여 전문)

오늘은 평상시와 다른 이메일을 받았다. 열어보니 '꽃섬 가는 길' 노래였다. 김성배 작곡협회장이 '꽃섬 가는 길'을 곡으로 재생산한 것이다. 테너 최재성의 노래까지 곁들였으니 형식상으로는 생산적 수용이 완성된 셈이다. 이제 내가 이 다양한 형식으로의 재생산된 텍스트들을 꼼꼼히 읽어야 할 차례이다.

문학이든 예술작품이든 독자나 감상하는 사람이 없으면 잉크요 물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즉 빈 자리를 꼼꼼히 채워가는 독자와 감상자가 있을 때에 비로소 작품으로 완성되리라고 본다. 작가의 의도를 알거나 주제를 파악하는 것으로 작품을 알았다고는 말하지 말자. 하나의 진리가 있어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예술작품이라고 믿던 시대는 지나지 않았는가. 어떤 사람이든 자기 나름대로 수용하고 또는 재생산하는 것이 곧 독서법이다.

신동호 화백의 이번 전시회는 이런 적극적인 독자들로 인하여 꽃 가득한 도원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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