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과 민족주의
올림픽과 민족주의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5.02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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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 규 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서울 올림픽 개최가 확정된 것은 1981년 9월30일 독일의 온천 휴양도시 바덴바덴에서의 일이다.

계엄의 기나 긴 겨울을 끝내고 사람들이 겨우 혼란에서 벗어나거나 혹은 군화와 총칼의 위협에 체념하고 있을 무렵.

사마란치 IOC위원장의 "쎄울, 코리아"라는 익숙하지 않은 발음은 분명 희망이고 억눌렸던 답답함에서 벗어나는 돌파구였다.

그해 겨울 나는 부산의 한 대학에 있었고 1년여를 공들인 연극공연의 심사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처지였다.

대부분의 경연대회가 그렇듯이 발표는 아래 순위부터 이루어졌고 그 사이 동향의 대학이 3위로 확정되자 실망을 감추지 못한 채 포기해야 할 것이라고 새김질하며 극장을 나서야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극장을 거의 빠져나오며 미련을 지우지 못했던 내 귀를 의심하게 하는 대상 발표의 감격적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때 뇌리를 스친 단 한가지 생각. '아마 바덴바덴의 감동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엉뚱한 연상 작용이 지금도 생경하다.

그리고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나는 레오나도 치프킨의 소설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을 떠올린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발자취를 찾아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소설 속 화자(話者)는 2개의 시간을 넘나든다.

반은 허구이고 그 나머지는 실제인 과거로의 '순례'는 소설가와 화자의 사이를 교차하며 좌절과 편집증 그리고 몽상적 환희를 조명한다.

거기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개인적 고통과 좌절은 물론 적의를 드러내는 반유대주의와 반독일주의가 투영되며 독자의 감정을 훔쳐가는 매개가 된다.

서울올림픽은 벌써 20년 전에 끝났다.

그러나 서울올림픽은 우리에게 식민지와 전쟁, 분단 그리고 독재 등으로 점철된 20세기의 부정적 굴레를 벗어나게 하는 긍정의 가치로서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다.

반면에 '민족주의'라는 결코 넘볼 수 없는 성역을 만들면서 국민의 우민화는 본격화되었고 배타성을 심화시키는 요인을 만들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로부터 20년, 세기는 20에서 21로 바뀌었고 연착륙을 걱정할 정도로 급속한 성장 경제의 시대를 구가하는 중국은 마침내 베이징올림픽을 눈앞에 두고 있다.

올림픽은 말 그대로 모든 세계인의 축제이고 인간의 한계에 대한 도전에서 분출되는 인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극한의 가치로서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새둥지를 모티브로 하는 아름다운 경기장을 지음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꿈꾸는 상생의 모델을 추구함은 그런 가치의 동반상승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올림픽이 이같은 본질의 중요성보다는 개최국의 자부심과 자국민의 지나친 자긍심 고취에 일방통행을 허용하는데 있다.

남과 나를 가르고 내가 아니거나 1등이 아니면 무조건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에 빠지면서 경쟁력만을 심화시킨다면 올림픽정신의 숭고함은 위협받지 않을 수 없다.

신화적 상징성을 내포하는 엄숙함에서 채화된 올림픽성화는 지켜져야 하고 반드시 꺼지지 않게 보호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성화의 불꽃은 그 자체가 온 인류에게 따뜻함과 밝음으로 숭상될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

하물며 남의 나라에서 그 나라의 공권력마저 인정하지 못하고 도전을 하는 일로써 성화의 가치는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는가.

세계화를 통해 지구촌이라는 말을 이끌어 낸 인류공동체는 사라지고 민족주의의 준동이 염려되는 일이 성화사수에서 비롯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올림픽을 계기로 극성을 띠고 있는 중화민족주의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민족'과 다른 것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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