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비와 욕망의 정치
두꺼비와 욕망의 정치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4.25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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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 규 호 <청주시 문화산업진흥재단>

도대체 누가 두꺼비인가. 그리고 어느 것이 헌집이고, 무엇이 새집인가.

어릴 적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모래놀이를 하며 불렀던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라는 노래가 자주 떠오르는 요즘.

두꺼비는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헌집과 새집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지 새삼 궁금해진다.

사실 지난해부터 광풍처럼 몰아닥친 대선과 지난 9일 총선이 끝난 뒤 정치는 국민의 관심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유보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왔다.

아니 보다 솔직히 말하면 정치에 대한 지나친 관심보다는 살아가는 일과 좀 더 나아짐을 위한 창조적 관심만으로도 국민의 생활은 벅찰 것이라는 미련도 컸다.

그리하여 이 봄, 흐드러졌다 시드는 꽃들을 찬미하고, 또 원흥이 방죽의 두꺼비는 올해에도 건강한지를 살피는 여유도 있었음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겹게, 힘겹게 확보한 원흥이 방죽의 두꺼비 생태통로는 두꺼비에겐 아직 익숙하지 못하고, 사람들은 거대한 성냥곽 같은 집을 지으며 방죽을 불편해 한다.

조막만한 손을 모래 속에 숨긴 채 그 위로 모래를 덮고 두드리며 불렀던 두꺼비집의 간절함.

그 속에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래의 허무함과 함께 동무들보다는 더욱 훌륭한 모래집이 지어지기를 바라는 욕망이 숨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이는 놀이일 뿐이고, 노래는 흥얼거림의 즐거움 이상의 의미는 없으며, 모래는 모래일 뿐임이 당연한 어린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런 천진함과 순수함이 전부였을 뿐이다.

문제는 욕망에 있다.

두꺼비집이 뉴타운이라는 해괴망측한 도깨비방망이가 되어 서민의 욕심을 자극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헌집이 새집으로 환골탈태하는 기대가 과연 유권자에게 해당되는 것인지, 아니면 찬란하고 웅장한 국회의사당으로의 입성을 위한 수단인지의 여부는 반드시 판단돼야 한다.

개발과 투기의 광풍에 휩쓸린 욕망의 정치에 대한 책임은 여야를 막론하고 막무가내 사탕을 내보인 정치권은 물론 그 사탕에 욕심낸 유권자들도 마땅히 통렬한 자기비판을 해야 한다.

먹는 일과 입는 일, 그리고 거주하는 일인 소위 의식주는 인간이 생태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지금 세계는 식량위기를 호소하는 목소리와 그로 인한 생명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그런 와중에 개발과 투기의 광풍에 편승해 부를 축적하고 신분상승을 꿈꾸는 일로 서민이 자유로워지거나 해방되는 일을 기대하는 것은 부자가 천국을 가고자하는 일만큼 무리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물며 그 책임공방을 둘러싸고 지방자치의 존엄성이 훼손되거나 인위적이고 정치적인 잣대로 왜곡되는 일은 위험하다.

물론 무소불위이며 비장의 무기인 입법권을 통해 지방자치단체를 옥조이는 법 개정을 할 수 있는 권한은 국회에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 전반에 걸친 계획성과 투기 과열로 인한 경제 질서의 왜곡에 대한 우려를 경계하는 일 역시 지방자치단체가 솔선해야 하는 일이고 그런 자치단체장의 고민은 서민경제를 위해 타당하다.

두꺼비는 지금 산란을 마치고 미래를 꿈꾸고 있을 시기이다.

누가 헌집에 살고 누가 졸지에 새집을 만들어 줄 것인가를 기대하는 욕심과 욕망에서 벗어나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이 땅의 백성이 됐으면 싶다.

원흥이 두꺼비에게서 좋은 소식이 쉽지 않은 이 봄, 두릅나물은 그런대로 신선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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