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4월에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4.18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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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청주시 문화산업진흥재단

이른 아침 들길을 걷다 풀 섶에 버려진 명아주 지팡이를 발견했습니다.

명아주 지팡이는 요즘 좀처럼 찾아보기 쉽지 않은 것입니다.

중국의 후한 때부터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우리나라도 통일신라시대부터 장수노인에게 왕이 직접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는 청려장(靑藜杖)이 명아주 지팡이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지금은 4월도 막바지로 저물어가는 계절입니다.

시인 T.S 엘리엇이 그의 서사시 '황무지'에서 노래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는 말을 실감나게 하는 길가 풀 섶의 명아주 지팡이.

녹색의 잎 윗면과 미세한 하얀색 솜털이 덮인 잎 아랫면의 가녀림으로 미풍에도 하늘거리는 명아주가 지팡이가 되어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의지가 되었겠지요.

4월 아침햇살에 '반짝'하면서 눈길을 끈 명아주 지팡이에서 삶과 죽음, 그리고 본질과 실용을 생각합니다.

세상엔 이미 사잣밥은 구경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습니다.

엘리엇의 '잔인한 4월'은 어쩌면 죽음보다 모진 황폐함을 토로할 수밖에 없는 절절함이 아니었을까요.

제각기 때를 맞추지 못하고 한꺼번에 피어나는 봄꽃들은 4월 막바지에 이르러 찬연하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물론 꽃이 지어야만 결실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면서도 4월이 3월과 다른 것은 생명력의 분출과는 다른 이미지 탓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잔인함'으로 기억되고 있는 4월은 이제 재생이 쉽지 않은 계절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 이 땅에서 민주대 반민주의 대립각은 무뎌지고 있습니다.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김수영 詩 '푸른 하늘을 中)로 번민했던 젊은 날은 가고, 그러다가 수유리 푸른 봄빛이 서러운 4·19의 의미는 철모르는 대학생들의 뜀박질로만 흔적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 4월에 다시 살아있음과 죽음을 생각합니다.

가창오리며 두루미, 논병아리를 비롯해 심지어 까마귀떼에 이르는 겨울 철새들이 동토를 향한 뒤끝에 조류독감이 또다시 덮친 한반도의 서쪽이 다시 서러움으로 몸 둘 바 몰라 합니다.

기업도시며 혁신도시는 부풀려짐으로 도치되고 그 사이 수도권으로 치중될 수 있는 집중에 대한 우려와 이미 평생을 갈아먹은 땅을 팔아치운 지역주민은 불안합니다.

또 새벽별을 본 뒤 밤 달이 지도록 학교에 갇혀 있어야 할지도 모를 우리의 미래는 신록의 계절인 5월이 오고는 있는 것인지 모르는 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지내야 하는 것은 아닌지도 걱정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땅을 갈아야 합니다. 뉴타운이 무너지든 새로 올려지는 일이 생기든 간에 욕심 대신에 얕은 땅에 쟁기질을 하면서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철 이른 개나리 대신 조팝나무 하얀 꽃이 무리를 이룬 수유리의 서러움이 흔적으로만 남아있을 4월.

허망하게 땅에 매몰되는 닭이며 오리들의 처절함에서 다시 살아있음과 죽음을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보수와 진보도 아닌 것이, 또 민주와 반민주도 아니기도 한 어정쩡한 한국의 4월에서 우리는 선택에 갈팡질팡하고 또 결정에 회한하는 욕심의 끝없음을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 들길 풀 섶의 명아주는 잎도 줄기도 여리기만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큰 의지였을 명아주 지팡이가 쓸쓸히 버려진 4월의 하늘은 그런대로 푸르른 데, 논밭은 아직 사람냄새를 제대로 맡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조건 깊게만 뒤엎으려는 욕심 때문만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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