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게 살자
착하게 살자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3.21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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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 규 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착하게 살자구요

이건 아닙니다. 천인공노할 끔찍함이 공공연히 벌어지는 세상에서 착하게 살자는 말은 정말이지 무기력합니다. 하물며 아이들에게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범죄에 악용되는 현실은 끔찍하기까지 합니다.

이쯤에서 성도착증과 정신병력이 의심된다는 배경과 범행 동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혜진, 예슬 두 딸의 처절한 모습에서 차라리 인간임이 부끄러운 세상입니다.

그러고도 분노는 이어지면서 그런 '짐승만도 못한' 인간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호흡하고 있음이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박찬욱 감독이 만든 영화 '친절한 금자씨'는 어린이 유괴를 이야기의 근본적인 모티브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13년의 수감생활에서도 잊지 않고 복수를 시도하는 영화의 전개는 대부분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다만 극중 금자씨(이영애 분)의 "너나 잘 하세요"라는 대사는 세상에 대한 냉소로 지금도 회자됩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잔인무도함과 그것에 대한 응징으로써의 복수는 각인되지 못한 채 이미지만 남아있는 셈입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야 겨우 기억할 일이지만 지난 1962년 벌어진 두형이 유괴사건은 당시 선량한 국민을 충격에 빠트리기에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이미자와 최정자, 오은주가 잇따라 부른 노래 '두형이를 돌려줘요'는 당시 극장에서 영화 상영에 앞서 소개하면서 국민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습니다.

특히 노래 중간에 삽입된 "아무것도 모르는 그 천진한 어린 것을 제 품에 꼭 돌려보내주세요. 네! 세상에 부모 마음은 모두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정말, 정말 애원이에요."라는 어머니의 애원은 수많은 국민의 눈시울을 적시게도 했습니다.

노래가사는 다섯살 어린아이를 납치 유괴한 참혹한 세상에서 '너를 잃은 부모님은 잠 못들고 운단다.'로 애절함을 호소하지만 어디 그 일이 잠 못자고 우는 일로 달래질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순진무구 착하디착한 어린이의 심성을 악용하는 범죄는 말 그대로 천인공노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 끔찍한 일은 어린이의 본성적인 선량함과 친절을 이용해 친근함을 가장한 뒤 유괴하는 수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린이들은 낯선 사람에게는 우선 경계심을 갖지만 친절과 도움을 원할 경우 기꺼이 베풀어주는 갸륵함이 있습니다. 그런 뒤 다시 접근하면 경계대상이 아닌 아는 사람이 되고 이 순간 범행의 대상이 되는 일은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착함을 순식간에 극악무도함으로 타락시키는 인간성의 상실이 무엇보다 가장 큰 아픔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더 이상 어떻게 착함과 친절함을 가르치며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을 심어줄 수 있을까요. 또 그런 망설임과 주저함 속에서 세상은 얼마나 혼탁해질 것이며, 인간은 또 얼마나 잔혹해질 것인지 마냥 두렵기만 합니다.

1962년 다섯 살이었던 두형이는 살아있다면 지금 마흔여섯의 중년입니다. 그리고 영화로 만들어졌던 '그놈 목소리'의 악몽의 되살아남이 다시 한 번 몸서리 쳐집니다.

이렇게 치를 떨게 하는 와중에서 세상에 대한 저주와 분노를 품게 될 것이 뻔한 이 땅의 어린이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도대체 착함을 가르칠 수도 없고, 선량함과 친절을 바른 길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어른들의 현실에서 선거는 무슨 필요가 있는 것인지.

또 물가는, 경제는 왜 이다지도 힘들게 하는지 혼란스럽기만 한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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