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과 '애국가'
'아리랑'과 '애국가'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03.07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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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 규 호 <청주시 문화산업진흥재단>

어느 날 퇴근길, 어김없이 팝음악이 흘러나와야 할 시각, 난데없는 교향악의 선율은 청취자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잠시 동안의 유쾌한 혼란에 빠지게 했던 뉴욕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평양공연과 그 실황중계는 잘나가는 장수 팝음악 프로그램을 대신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어 열린 뉴욕필의 서울 공연, 첫 곡은 애국가였고, 그 전 평양에서는 북한의 국가와 미국 국가가 연주되고, 이례적으로 무대에 성조기와 인공기가 놓이기도 했다.

그리고 남과 북에서 똑같이 울려 퍼진 아리랑의 선율은 서로 다른 '애국가'와 서로 같은 '아리랑'의 절절함이 저절로 배어나온다.

그리고 다시 3월.

아파트 안내 방송은 태극기 게양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휴일 아침의 나른함을 들깨우고, TV는 '잊혀진 기록,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을 조명하며 나름 의미를 중첩시킨다.

문제는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나라를 나라답게, 인간을 인간답게 인식하느냐에 있다.

때에 따라서 가슴 한 쪽이 서늘해지거나 울컥 뜨거운 피가 용솟음치는 애국가의 상징성은 분단과 대립의 고통 속에서도 진지하다.

축구경기에서 조차 애국가와 태극기가 억제되어야 한다는 트집도 가관이려니와 이를 FIFA의 중재에 따라 의존하려는 시도 역시 서글프기는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 고장 3·1공원에는 받침대만 남은 일제의 잔재가 여전히 자리하고 있고, 그 사이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는 시한부 생명에 몸을 맡기고 있다.

바이츠 제커 독일대통령은 1985년 한 연설에서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자는 현재에 대해서도 눈이 멀게 된다. 비인간적인 행위를 마음에 새기려 하지 않는 자는 또 그러한 위험에 빠지게 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

과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철저한 반성과 검증, 그리고 피해의 엄연함에 대한 보상과 속죄, 더 나아가 화해가 없는 현재는 결코 푸른 미래를 가져올 수 없다.

다시 3월 '애국가'가 절절하다.

그 애잔함 속에는 또 작곡가 안익태 선생의 친일 의혹이 여전하게 살아있고, 수많은 당대의 지식인들 역시 자유롭지 못한 채 3·1절의 의미는 벌써 퇴색되고 있다.

올해로 90번째 생일을 맞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 대통령 넬슨 만델라를 축하하는 열기가 벌써부터 뜨겁다.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고유명사를 등장시킬 정도로 철저하고 기막힌 흑백 인종차별 정책을 타파하고 공화국 사상 첫 평등선거에 의해 선출된 만델라의 가치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협력위원회'라는 과거사 청산을 통해 더욱 빛을 발한다.

이쯤에서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이 없고, 어느 한 사람 온전치 않은 일제 잔재의 청산이 이 시대의 실용과 어울릴 것인가에 대한 반문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국가'는 애국가대로 장엄해야 할 것이며 그 곡을 만든 이도 존중되어야 할 것이나, 진실이 왜곡되거나 덮여지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언 땅, 아무것도 살아날 것 같지 않고 좀처럼 녹아내릴 것 같지 않던 견고함도 봄빛의 부드러움에는 풀리게 된다.

그 속에서 애쑥의 푸릇함이 살아있듯이 이제 '애국가'는 분리를 넘어, 또 차이를 넘어 진정한 3월로 길이 살아남아야 한다.

청산이 쉽지 않은 3월 하늘, '아리랑'과 '애국가'의 묘한 차이 속에서 넬슨 만델라가 새삼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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