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의 하이닉스
2007년의 하이닉스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12.31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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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김 승 환 <충북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상임대표>

지난 2007년 1월4일, '2007년은 체게바라 서거 40주년인 뜻깊은 해입니다'라는 발화가 있었다. 청주 예술의 전당 대회의실을 가득 메운 250여명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체게바라가 누구일까와 같은 호기심으로부터, 그것이 지금 중요한 쟁점인가 하는 의아심에 이르기까지 팽팽하지만, 잔잔한 긴장이 감도는 신년 아침이었다. 곧이어 정우택 지사께서 축사를 하면서, "충북은 경제특별도를 위하여 총 매진하여야 합니다"라고 선언했다. '잘사는 충북' '힘있는 충북'의 그림이 제시되었고, 참석자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특이한 방식으로 체게바라와 경제성장이 대립한 무대였다. 이처럼 충북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신년하례식 겸 동범상 시상식 날은 긴장과 협력이 동시에 작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충북도청 여성복지국장 인사문제가 터졌다. 그 일로 시민사회단체와 충북도청은 대립과 대결의 전투적 상황이 되었고, 충북도청에서는 인사권자의 고유권한에 대해서 시비하는 충북시민사회단체를 비난하는 소리가 높았다. 시민단체 역시 21세기 새로운 생존의 형태는 통치가 아니고 주민주체의 협치(governance)라는 것을 준거로, 충북도청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몇 개월간 이어진 이 사안 때문에 충북도청과 시민사회단체의 관계는 단절되었고, 자연히 경제특별도에 대해서도 협력의 정신을 발휘하지 못했다.

2007년 4월쯤, 이천을 지나던 나는 전율을 느꼈다. '잘사는 청주가 못사는 이천을 수탈한다'와 같은 내용의 현수막이 온 도시를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폭동전야와 같은 분위기였다. 청주 또한 그랬다. 수백 개도 넘는 현수막이 도시를 전투적 공동체로 만들었다. 그런 표면장력의 힘들이 내린 결정은 하이닉스 청주공장 증설이었다. 충북은 환호했다. 마침내 이겼다는 승리의 축배를 높이 들었다.

2007년 말, 충북 10대 뉴스에는 하이닉스가 단연 선두를 차지했다. 한결같이 하이닉스 공장증설, 8조7000억 투자, 수천개의 일자리, 첨단산업 등의 이유가 뒤따랐다. 이 노력을 한 정우택 충북지사, 노화욱 부지사, 남상우 청주시장, 홍재형, 오제세, 노영민 의원, 도의회 시의회 그리고 공무원, 충북의 시민 등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노력한 더 많은 분들께 경의를 드린다. 이런 희망에도 불구하고 '체게바라 서거 40주년'을 강조한 눈으로 보면, 하이닉스 공장 증설의 장밋빛 청사진은 민중을 외면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2007년도 저물어 갈 12월, 하이닉스 청주공장 증설현장에서 세 명이 죽었다. 반도체와 같은 장치산업(裝置産業)은 기술력과 함께 시간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데 하이닉스 공사현장에서 벌어진 사망 사건은 경쟁국가와의 속도전이 빚어낸 비극이다. 노동청은 즉각 공사 중지명령을 내렸지만, 곧이어 해제했다. 민주주의만 피를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니었다. 경제성장도 피를 먹고 자란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또한 하이닉스 청주공장이다. 그런데도 충북사회의 주요 쟁점은 8조원의 투자와 수천 개의 일자리에 묶여 있었다.

체게바라의 눈에는 경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반대의 눈으로 보면 체게바라는 비운의 혁명가였을 뿐이다. 아니 알 필요도 없는 존재다. 역시 체게바라의 입장에서는 경제절대주의는 순서를 잘못 설정한 오류다. 잘살기도 전에 죽거나, 비인간적인 상황이 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하이닉스 공사현장에서 죽은 노동자가 중국인들이라고 해서 관계없다고 할 수는 없다. 전후를 생략하겠거니와 2007년의 충북은 하이닉스와 무척 관계가 많은 한 해였거니와 2008년은 체게바라의 눈과 경제특별도의 눈이 서로 만나는 이해와 협력의 시간이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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