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의 교육학
틈새의 교육학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11.23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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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 칼럼
오 희 진 회장 <환경과 생명지키는 교사모임>

날씨가 추워졌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찬 바람이 불었다. 얼굴이 시리고 옷이 열린 가슴께로 찬 기운이 들어왔다. 아직 천연의 색깔을 내고 붙어 있던 많은 나뭇잎들이 일시에 떨어져 땅위에 널렸다. 찬바람을 피해 몸을 낮춘 작은 풀들도 이제 언땅에서는 도리없이 시들어 널브러졌다. 그리고 마침내 지상에 얇게 눈이 내렸다. 모든 것이 그 위에 멈춰 서서 색감이 더욱 진해지는 계절이 되었다. 이렇게 겨울이 왔고 우리는 배운다.

겨울은 정지의 계절이다. 겨울에 모든 것은 얼어붙고 꼿꼿하게 제자리에 머문다. 그리고 겨울에는 그 멈춰 선 사물과 사물의 사이가 어느 때보다 크게 보인다. 따라서 겨울은 그 빈 자리를 통해 다른 때에는 가려있던 다른 형상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더욱이 제 몸에 무성하게 잎을 달고 꽃을 피워 마침내 실한 열매와 씨앗을 맺고 말리라는 성장의 원리가 사라지는 때이다. 갖가지 성장이 있을 것이며, 그 중에 생물의 생장이 있다.

만물이 생기고 자라나는 이 자연의 성장은 겨울에는 스스로 그 늘어난 몸을 덜고 제자리에 선 채 뿌리를 깊숙이 다진다. 모든 것이 따라서 수축하며 줄어든 만큼 사물 사이에 너른 공간이 열린다. 그 뿐이랴, 사물 자신은 제 몸에 작은 금이 가고 살갗이 터지며 곳곳에 틈새가 생겨나 다른 것에 자신을 통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이 틈새의 교육학이다.

또 다른 성장이 있다. 인간이 자연을 변형하고 이용해 이익의 규모가 커지는 이 성장은 다르게 개발이라 부른다. 개발은 모든 인간의 종합적이고 전인적 성장 -자연의 재생 순환적 성장과 같은- 대신 단지 물질적 바탕을 확장한다는 의미에서 경제성장을 가리킨다. 이 경제성장은 침탈과 파괴, 죽임의 원리로 작동하는 식민지적 사회관계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제국주의의 논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경제성장의 사상적 바탕에는 적자생존, 우승열패를 모든 삶의 가치로 따지는 사회적 진화론이 똬리를 틀고 있다. 더욱이 이 성장은 편안과 불편, 선진과 후진,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시선을 통해 끊임없이 소비를 부추기고 삶의 풍요를 신경증적으로 강박하며 가난을 멸시한다.

그런데 자연의 겨울처럼 모든 군더더기들을 떨어뜨리는 인간의 겨울이 오면 이 성장은 어떻게 될까. 구체적으로 인간의 겨울이란 우리에게 사회안전망 없는 부익부빈익빈, 비정규직 양산, 농업의 붕괴, 여전한 장시간 노동, 청년 실업, 살아남기 경쟁의 교육, 성장만능에 따른 부정부패 의식의 약화 등 사회 양극화의 추위에 따르는 것이리라.

이 각각의 추위가 시시때때 닥치자 돌이킬 수 없는 성장의 욕망은 그 속성상 어떤 성장의 구호이든 꽉 부여잡고자 한다. 그리고 거기 정체된 우리는 그 텅비고 수축된 가슴과 균열되는 꿈의 틈새를 어쩌지 못해 무기력함에 빠진다. 그리하여 그 틈새를 통해 타자 -자본의 위세와 권력의 위계, 이익의 조정과 살림의 공동체- 를 깊숙이 들여다 볼 여유가 없다. 오히려 성장의 주술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그 틈새는 반드시 메우고 성형해야 할 하나의 흉한 상처일 뿐이다. 결국 우리는 오히려 온전하지 못한 채 부서진 자신의 삶에 좌절하고 부끄러워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인간의 겨울 또한 자연의 겨울과 같아야 함을 통찰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틈새에서 자주적이고 자율적인 삶의 지혜와 기술, 즉 '자신과 이웃을 돌보고, 스스로 배우고, 사람을 사귀고, 고통을 견디고, 질병과 노화를 통해 삶의 궁극적 의미를 깨닫는 삶의 기술'(김종철)을 배워야 한다.

마침내 우리는 '저 텅 빈 곳을 보라, 휑하니 빈 방이지만 환하게 밝지 않은가. 좋은 일도 거기 머문다.'(장자)는 말씀을 이룬다. 그것이 틈새의 교육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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