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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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11.16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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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 청 시 론
정 규 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친구여! 그대가 한 쪼가리 언 땅에 누워 남산만큼 배부른 만삭의 봉분에 눌려 있는 사이, 그대의 곱디고운 딸은 지금쯤 안간힘을 쓰며 피땀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또르륵 또르륵 눈동자를 굴리고 사그락 사그락 문제지에 연필을 놀려가면서 어쩌면 이승에서의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시험을 그대의 딸은 치르고 있을 것이네.

불과 2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 사이 그대의 딸은 잘 자라고 이제 대학진학을 위한 산고를 치르고 있으니 세월은 참으로 쏜살같다는 말을 실감하는 요즘일세.

친구여! 저승에도 이런 무지막지한 통과의례가 있기는 한가.

그대를 떠나보내면서 흘렸던 모진 인연의 눈물이 아스라한 사이 남아있는 우리는 어쩌면 세상이 이리도 변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해 소스라치는 경험을 거듭하고 있다네.

초등학교를 포함해 중ㆍ고교를 거치는 12년 동안을 오로지 대학진학에만 매진해야 하는 세태의 고정불변이 억울하기도 하면서 그래도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 서글픈 11월이라네.

그 사이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음'이 성공의 비결인 것 마냥 화석화돼버린 현실에 치를 떨면서도 특목고의 신화에 기웃거리며 시험문제 사전유출이라는 부패의 고리를 만들고만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네.

친구여! 자네 딸을 비롯한 2007년 대한민국의 모든 수능 수험생들은 일생의 가장 큰 고난과 도전을 치르는 통과의례를 이제 막 마치고 세상과 마주하게 된 셈이네.

대개 모든 시험이라는 것이 크든 작든 살 떨리는 조바심을 동반하게 마련이지만, 12년의 수학과정과 앞으로 남은 나날들의 잣대가 수능이라는 이름으로 단 하루 만에 평가되는 일은 이승이 갖고 있는 안타까움의 하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네.

그런 와중에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범죄를 단죄할 수 있는 최고 엘리트 집단의 떡값 수수 공방은 수능을 거친 후에도 시련은 얼마든지 터져 나올 수 있다는 부패 고리의 불변성을 말해주는 셈이 아닌가.

더군다나 그 상대가 세계 초일류 기업을 표방하면서 국적을 초월하는 대접을 받고 있는 집단이라는 점은 과연 지금 대한민국의 이승에 진실과 진리는 있는 것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있네.

굳이 진실과 회개를 들먹이지 않아도 누가 누구를 수사함으로써 단죄를 하거나, 누가 누구에게 반성하고 사죄해야 하는지, 그리고 과연 그런 일이 있을 수는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엄연한 현실이라네.

친구여! 그대가 가고 없는 자리 내 눈물은 이미 메말라 더 이상 그대를 그리워하거나 서글퍼하기도 쉽지 않은 이승에서 애지중지 키워왔던 그대의 딸은 무사히 2007년 대한민국의 수능을 치러냈네.

낮의 해 길이는 짧아져 이미 짙은 어둠이 세상을 가려주는 늦은 시각,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 홀가분한 몸과 마음으로 지나 온 12년을 털어낸 딸아이의 마음을 저승의 그대가 과연 헤아릴 수는 있겠는가.

그리하여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찰라의 가벼움에 몸서리를 친 뒤 남은 겨울을 종종걸음으로 대학문을 두드려야 하는 초조함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다만, 그런 설렘과 초조함이 명경처럼 맑아져 떡값은 진짜 떡집에서만 통하고, 평범함과 비범함을 초월해 모두가 똑같은 상태에서 시험에 들게 하는 세상이 그대가 떠나고 없는 이승에서도 반드시 이루어질 날이 올 거라고 믿고 싶네.

친구여! 부디 이 겨울도 평안하시고, 그래도 그대 딸에게 영원히 순결한 애비로 남아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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