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야만 더욱 아름다워진다.
버려야만 더욱 아름다워진다.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11.15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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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천
심 억 수 <시인>

가을이다. 온 산이 저마다의 고운 빛으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가을은 세상이 무지개빛이어서 더욱 아름답다. 떠날 때를 아는 자만이 자신의 뒷모습에 붉은 노을로 수놓을 수 있다고 하였다. 세상의 나목들도 버려야 하는 순간을 알기에 더욱 아름다운 빛깔로 가을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형형색색의 나무들 중 나는 은행나무를 좋아한다. 노란 은행잎을 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속에 감추어진 생각들이 아름답게 되살아난다. '은행나무처럼 건강하게 오래 살아하지' 하는 희망과 '세상을 떠날 때 나도 저토록 고운 빛깔을 남겨 야지'하는 게 그것이다.

천년이 넘는 은행나무를 보면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이 느껴진다. 은행나무가 오래도록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은 열매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와 독성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나름대로 해본다.

학창시절 노란 은행잎을 따서 책갈피에 끼워 두었었다. 은행잎을 책갈피에 끼워 두는 것은 운치뿐만 아니라 책에 좀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또한 집안의 해충을 없애기 위해 은행잎을 헝겊에 싸서 집안 구석에 두었던 기억 또한 새롭다.

지난 일요일 모처럼 야외에 나간 일이 있었다. 은행나무 밑에 은행이 노랗게 떨어져 있는데도 아무도 주워가지 않았다. 문득 천식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 생각이 떠올랐다. '이 은행으로 어머니의 기침 가래를 고칠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에 비닐봉지를 들고 땅에 떨어진 은행을 한 알 한 알 주워 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비닐봉지가 제법 묵직해졌다. 들여다보니 두어 되 가량 되는 것 같았다. 모처럼 어머니를 위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해왔다.

그러나 그 생각을 왜 못했을까. 은행에는 독이 있다는 사실을. 얼굴에 옻이 올라 두 눈을 못 뜨고 한 동안 고생을 했다. 따지고 보니 은행 값보다 병원비가 더 지출되었으니, 세상에 공짜란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올 가을, 은행나무는 나에게 남을 해하면 나에게 더 큰 화가 되어 돌아오고 남의 허물을 들추면 나의허물은 더 드러 난다는 교훈을 갖게 해준 것이다.

은행나무는 건드리지 않으면 역한 냄새를 풍기지도 독성을 전하지도 않고 다만 자연의 이치대로 종족 번식을 위해 씨앗을 보호할 뿐이다.

요즈음 TV화면으로 일련의 소식들을 전해주는 주인공들이 독을 잔뜩 품은 노란 은행잎으로 보인다.

1년 내내 매연을 먹어가면서 콜록 콜록 해도 그 소리가 다 산소인줄 알고 자가당착에 빠진 의사와 약사들이 은행잎 같다.

속마음은 다 타들어 가도 공기처럼 맑은 영혼이라며 떡값을 주고받는 식자들이 은행잎 된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대기업의 윤리마저 저버린 경영자들이 은행잎 같다,

진정한 노동의 의미를 저버린 채 자신의 영욕에 사로잡혀 시위현장에서 머리띠를 두른 노동자들이 은행잎 같다.

당리당략에 쓸데없이 고함을 지르고 입만 열면 국민의 뜻이라고 아전인수 격으로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위정자들이 은행잎 같다.

서로가 서로의 치부를 들추고 흔들어 뒤죽박죽 썩은 냄새만 폴싹 폴싹 더해 가는 각 정당의 대선 후보들이 은행잎 같다.

나무들은 버려야 하는 순간을 알기에 더욱 아름다운 빛깔로 가을을 승화시키고 있다. 버려야만 더욱 아름다워지는 나무처럼 세상의 모든 군상들이 떠날 때를 아는 찬란한 단풍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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