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난 시계
고장난 시계
  • 신찬인 수필가
  • 승인 2024.03.12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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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신찬인 수필가
신찬인 수필가

 

거실의 시계가 가지 않는다. 오후 5시 30분에서 멈췄다. 벌써 며칠 되었다. 건전지가 소모된 듯싶지만 바꾸어 끼우지 않는다. 시계를 자주 바라보지 않기에 그다지 불편하지도 않다. 실은 오전에 멈추었는지 오후에 멈추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내 생각에 오후에 멈춘 것으로 간주하는 것뿐이다.

분침이 가파른 내리막을 지나 이제 막 경사를 힘겹게 오를 기세다. 이어서 시침도 마지못해 따라가는 듯 늦장을 부리고 있다. 문득 내 생애의 시점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 내 삶의 시간 또한 쾌적했던 시절을 대부분 보내고, 이제 서서히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오지 않았는가.

문득 `고장 난 시계'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한때 노래방에 가면 너나없이 부르던 노래다. `세월아 너는 어찌 돌아도 보지 않느냐,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라는 가사의 노래다. 덧없는 세월에 가는 청춘을 아쉬워하며 부르던 노래다. 오후 5시 30분, `여기서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새해를 맞이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봄이다. 친구들을 만나면 종종 세월이 너무 빠르다고 하소연을 한다. 움켜쥔 손에서 마른 모래가 빠져나가듯 시간이 주르륵 흘러내린다고 아쉬워한다. 젊었을 때는 그리도 더디 가던 시간이 나이가 들면서 왜 이리 속도가 빨라졌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누군가는 말한다. 우리의 뇌는 새로운 놀이와 감동만을 기억한다고. 그래서 생활에 변화가 없고, 새로운 것이나 감동할 게 없는 나이가 되면 시간이 무더기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란다.

새벽녘에 잠이 깼다. 평소 일어나는 시간보다 조금 이른 듯싶다. 5시쯤 되지 않았을까. 핸드폰을 보니 영락없이 그 시간이다. 너무 이른 듯싶어 거실로 나가 창밖을 보니, 동남쪽 하늘에 왼쪽 배가 불룩한 달이 떠 있다. 그믐달이다. 소파에 기대어 밤하늘을 바라본다.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에 오직 그믐달만이 고고하게 빛나고 있다. 음력 26일에서 28일 잠깐 나타나는 달이란다. 새벽에 잠시 보이다가 동쪽 하늘에서 해가 뜨면 금세 사라지는 달이다.

늘 휘영청 탐스러운 보름달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또 뭔가. 양쪽 끝으로 추어올린 모양새가 깜찍하다고 할까, 서두르지 않는 품새가 여유 있다고 할까, 도드라지지 않는 은은함에 품격이 있다 할까.

나도향 작가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외로운 달이라고 했다. 객창 한등(寒燈)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 드는 사람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잡고 무슨 한(恨)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달이라고 했다.

세상이 멈춘 듯 고요한 시간이다. 달은 미동도 하지 않고 멈추어 있다. 문득 밤하늘에 붙박이처럼 박혀 있는 그믐달과 멈추어 있는 시계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이렇게 모든 게 멈출 수는 없는 걸까.

그렇게 소파에 기대어 있다 보니 여명이 밝아 온다. 황금빛이던 달은 점차 푸르스름해지더니 미색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희끄무레해지더니 이내 사라지고 만다. 너무도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지는 달, 우리네 삶과 닮았다. 아 그렇구나, 그래서 나도향 작가는 고고하다고 하지 않고 애처롭다고 하였구나.

시간이 가지 않고 멈추어버린 시계, 빛을 잃고 사라진 그믐달, 그래도 지구는 돌고 시간은 가고 있다. 어디선가 “째칵 째칵”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인제 그만 건전지 약을 갈아 끼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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