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돌호박
맷돌호박
  • 김기자 수필가
  • 승인 2024.03.10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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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기자 수필가
김기자 수필가

 

곱다기보다는 야무진 모양새다. 저리되기까지 수많은 볕과 비바람을 견뎌 왔으리라. 애호박이나 풋호박에 비해 성숙했다는 의미를 가진 늙은 호박의 또 다른 이름, 맷돌호박이다. 균형 있게 골진 자태 그리고 완숙한 빛깔마저 눈길을 당기기에 충분하다. 가을부터 겨울을 보내는 동안 집안으로 들여 얼지 않게 고이 모셔두다시피 해야 한다.

겨울이 조용하게 지나가고 있다. 수시로 들여다보며 상태를 살피는 것도 호박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싶다. 그중 가장 튼실한 호박 하나를 골라 옛 맛을 찾아 오른다.

어린 시절 친정엄마가 호박범벅이며 샛노랗게 끓여주던 국의 맛이 진한 향수로 온몸을 감싸왔기 때문이다.

자리를 넓게 펴고 단단히 준비를 한다. 호박과 이제 씨름을 할 차례다. 정말 맷돌만큼 단단하니 칼을 들이대기가 조심스럽다. 자칫하면 손을 다칠까봐서다. 우여곡절을 치른 후에야 호박은 속을 드러내 보인다. 노란 속살과 함께 촘촘한 씨앗들이 세상의 햇살에 놀라듯 눈부셔 하는 모양새다.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씨를 걷어내고 껍질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특별한 생각이 밀려왔다. 늙은 호박이라고 하면 애호박부터 자연스레 떠올리는 식품의 속성이 있지 않던가.

감치는 부드러운 맛, 여러 가지 요리와 좋은 영양소를 제공한다는 것은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다. 순간 호박이 말을 하듯 완숙한 모양의 겉과 속에 대해 돌아보도록 하고 있었다.

사람의 일생도 그렇게 익어서 색다른 풍미를 지니고 있다는 소리로 들려왔다.

곱디고운 청춘은 오래전에 흘러갔다. 거울속의 내 얼굴이 적나라하게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뿐이랴. 호박을 손질하던 중 피부에 와 닿는 것은 그동안 자아의 내면과 외면의 또 다른 차이점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듯해도 때로는 급하고 저돌적으로 속내를 드러내기가 다반사였다. 예견치 못할 불상사를 치르고 난 후에야 후회한들 이미 때는 늦었으니 말이다. 크건 작건 늙은 호박의 껍질처럼 쉽게 무너지지 않는 성격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풋풋한 시절을 지나오는 동안 나도 모르게 변한 것이 많다. 하지만 삶의 내부와 외부로부터 겪어야 했던 과정들은 오히려 성숙한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맷돌호박의 겉모양처럼 골고루 늙어갈 뿐더러 삶의 터전에서부터 늘어난 식솔까지 맷돌의 자세인양 흐뭇하게 바라보는 순간이다.

흘러간 날들이 어제인양 가깝다. 호박처럼 겉과 속의 본질이 다를지언정 지탱하고 있는 구심점은 오로지 하나를 위해서였다.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있어서 최선을 다 해야만 더 나은 내일로 간다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렇지만 몸과 마음이 균형을 잡지 못한 채 조금씩 흔들릴 때가 있었음을 어찌 숨길까. 이제는 맷돌과 같이 안정된 모습으로 앉아 있다고 해야 하나.

늘어난 여유만큼 느슨히 좌우를 살피기도 하며 겉보다는 속에서 우러나오는 호박의 맛처럼 인생장막을 지켜가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못생겨서 호박이라는 이름을 언제부터 불러왔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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