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탁발(德山托鉢) 4
덕산탁발(德山托鉢) 4
  • 무각 스님 괴산 청운사 주지
  • 승인 2024.03.07 15: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낮은자의 목소리
무각 스님 괴산 청운사 주지
무각 스님 괴산 청운사 주지

 

문득 콧구멍이 없다는 말을 들으매 온 우주가 자신임을 깨달았네.

연암산 아랫길 할 일 없는 돌 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네.



청운사 여여선원에도 코끝으로 봄바람의 미풍이 느껴져 옵니다. 이 시간에 탁마할 공안은 단도직입형 공안인 무문관 제13칙 덕산탁발 4입니다.

무문관의 열세 번째 관문은 떠들썩합니다. 덕산(780~865) 선사가 공양 때도 아닌데 발우를 들고 공양 간에 가려고 하지를 않나, 그것을 본 제자 설봉(822~908) 선사가 스승을 타박하지를 않나 또 다른 제자 암두(828~887) 선사는 스승 덕산 선사의 경지를 감히 평가하지를 않나 말입니다. 그야말로 위아래의 위계가 붕괴되어 버린 형국이 이 열세 번째 관문에서 펼쳐지고 있지요.

스승과 제자라는 위계 구조를 매우 강조하는 다른 종교의 사유 전통에서는 아마도 혀를 찰 수도 있는 풍경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렇게 스승을 무시하는 제자들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광경은 외적인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내적인 권위만을 강조하는 불교 전통에서는 매우 익숙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임제선사가 말씀하신대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 스스로 조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는 불교의 전통에서만이 가능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덕산 선사는 명백히 스스로 주인공으로 일어서는 데 성공한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삶이란 일체의 다른 것들을 조연으로 보는 삶이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이유로 보아도 주인공이 어떻게 종소리와 북소리가 울려야만 밥을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배가 고프면 먹고 배가 부르면 쉴 뿐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배가 고파서 덕산은 발우를 들고 공양간으로 향했던 것이지요. 대 자유인인 덕산 선사는 꺼릴 것이 없었을 겁니다. 덕산 선사는 방장실을 차지하고 있는 대선사라는 허울 정도는 훌훌 벗어던져 버릴 수도 있는 자연스러운 분이었을 것입니다.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도 북도 울리지 않았는데 발우를 들고 어디로 가시나요?”라는 제자 설봉 선사의 이야기에 덕산 선사가 방장실로 돌아간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공양 간에 아직 식사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스승의 경지를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설봉 선사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건데요. 스승의 이러한 행동이 마치 노망든 노인네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설봉 선사가 자신의 고민을 사제 암두 선사에게 토로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을 겁니다. 이런 사형의 고민을 듣자 암두 선사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위대한 덕산 노장이 아직 `궁극적인 한 마디의 말후구(末後句)는 알지 못하는구나!” 깨달음에는 원래 처음이 있고 끝이 있다고 하는 것은 잘못 아는 것이지요. 말후구라 함은 최초구라는 상대적인 관념에 끌려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수행으로 깨달은 자리는 처음과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성의 자리는 일체가 평등하기 때문에 어떠한 분별과 차별도 용납하지 않는 곳이라는 말이지요. 다음 시간에는 덕산탁발 5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