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우제
어떤 기우제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4.03.0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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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눈비 그치고 날이 차다. 입춘도 훌쩍 지났으니 아무래도 이 추위가 동장군의 마지막 떠세가 아닐까 싶다. 지난겨울은 제법 눈이 오고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비도 많이 내렸다. 부디 그것으로 봄 가뭄은 없었으면 한다. 성실하게 일하고도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서 한해 농사를 망쳐버린 안타까운 경우를 종종 봐왔다. 특히 올해는 농부가 된 아들 때문에 계속 날씨를 신경 쓰게 될 것 같다.

지난달 몇 주간은 틈만 나면 용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갑진년 청룡의 해를 맞아 청룡이 그려진 향초를 가까운 지인들에게 선물하기 위해서다. 민화에서 청룡은 벽사의 의미가 있다. 새해를 맞이하며 나쁜 기운을 막아주고 경사가 많이 생기라는 뜻에서 청룡을 그리기로 한 것이다. 향초 또한 소원성취의 뜻이 있으니 새해 선물로는 안성맞춤이라고 생각되었다.

예로부터 용에게는 구름을 다스려 비를 내리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백성을 보호하고 다스리는 왕에 비유되곤 했다. 왕의 얼굴을 용안(龍顔)이라 하고, 왕이 앉는 의자는 용상, 의복은 용포라고 불렀던 이유이다. 또 서울의 용산처럼 전국 각지에 `용'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이 있는 걸 보면 그만큼 우리 민족은 용을 고귀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믿고 숭배했던 듯하다.

민화에 빠져들던 초창기에, 공모전에 청룡도를 출품해 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청룡의 얼굴이 의외로 귀여워서 놀랐었던 기억이 난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활활 불타오르는 여의주를 움켜쥐고 있는데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순박했다고나 할까.

또 용은 상상의 동물이라 그런지 여러 동물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목은 뱀의 비늘이고, 머리엔 사슴의 뿔이 있으며, 배는 큰 조개 모양이다. 또 토끼의 눈과 소의 귀, 호랑이 발바닥에 매의 발톱을 가졌다. 그런데 신기한 건 이런 이질적인 것들이 어색하지 않게 어울린다는 점이었다.

중국 한비자 설난편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용은 상냥한 동물이다. 그러나 턱 밑에 거슬러서 난 비늘이 하나 있는데 만일 이것을 건드리게 되면 용은 그 사람을 반드시 죽여버리고 만다. 군주에게도 이런 역린(逆鱗)이 있다.” 여기에서 연유하여 군주의 노여움을 `역린'이라 한다는 것도 알게 됐었다.

군청(群靑)과 미감(美紺), 호분(胡粉)을 섞은 산뜻한 푸른 빛으로 용의 몸통을 채색하고 연녹색 갈기는 진한 황초(黃草)로, 여의주 불꽃은 양홍(洋紅)으로 바림했다. 숨결을 불어넣듯 마지막까지 정성스럽게 붓질하면서 청룡이 가진 상서로운 기운이 그림 속에 촘촘히 스미길 바랐다. 이렇게 며칠 채색하고, 바림하고 마무리 선까지 치고 나면 비로소 용 한 마리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걸 엄지손톱만 한 인두 다리미로 꼼꼼히 다림질해 촛농이 한지에 골고루 배도록 향초에 붙이면 완성. 청룡은 그렇게 날아갈 준비를 끝냈다.

옛 조상들은 가뭄이 들면 용 그림을 그려서 기우제를 올렸다고 한다. 어쩌면 지난 몇 주간 나는 특별한 기우제를 올렸던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려낸 용들이 각각의 자리에서 제 주인을 견고하게 지켜주길 바란다. 그러다 혹시 삶이 힘들어질 때 한 번씩 메말라 갈라진 그 마음들을 촉촉하게 적셔준다면 그보다 더한 축복은 없을 것이다. 내게 그림 그리는 재주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기우제도 끝났으니, 나도 내 농사를 시작해 볼까? 일단 꾀부리지 말고 꾸준히 할 것! 진인사대천명이라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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