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윽한 아름다움
그윽한 아름다움
  • 임현택 전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 승인 2024.03.05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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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전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임현택 전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유려한 곡선 꾸밈없이 넉넉하다. 맑고 깊은 유백색의 당당한 모습 매끈하게 흘러내리는 기품이 시선을 압도한다. 몇 발짝 뒤로 물러나 유리 벽 넘어 고고하게 앉은 자태에 매료되어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둥글넓적한 주둥이에 만삭의 둥그런 배를 끌어안은 듯 풍만한 형태는 참으로 오묘하다. 한 획도 없이 청순한 처녀처럼 무색으로 치장한 자태가 어찌 저리도 당당할까. 고요한 느낌 날이 선 듯 미끄러지듯 흐르는 선 미끈한 곡선 바로 달항아리다.

유홍준 교수는 달항아리를 두고`한국미의 극치'라고 했다. 최순우 전국립중앙박물관장은 `어리숙하고 순진한 아름다움, 원의 어진 맛 때문에 넉넉한 맏며느리 같다'라고 표현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릇이라 했다. 모두가 극찬을 하는 이유 화려한 색채도 없이 단색으로 단아하고 자연스러운 형태의 백자로 한국미의 극치인 것 같다. 달항아리가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선 수십억에 낙찰됐다. 보존상태가 훌륭하고 수려한 모양과 우윳빛 유백색으로 귀한 몸값으로 대접받으며 자연스레 유리 벽 넘어 깊숙하게 보관되고 있다.

천정부지로 솟은 보배로운 달항아리 사용처는 조선 문헌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톺아보면 서민들에게 잘 어울릴 듯한 소박한 순백의 달항아리다. 유추해 보면 똬리에 딱 맞을 것 같은 좁은 굽과 주둥이가 둥글넓적한 걸 보면 아낙들이 허드레로 사용하던 물동이가 아니었을까. 예전의 친정집 부엌 광에도 옹기로 된 달항아리가 다양하게 있었다. 친정어머님은 가을이면 땡감을 따 감과 볏짚을 켜켜이 담아 옹기 달항아리에 저장하여 홍시를 만드셨다. 커다란 쌀독 옆에 조신하게 자리 잡은 절미 달항아리도 있었다. 아들 둘과 딸 넷의 여섯 남매를 둔 대식구의 식량은 만만치가 않았다. 매 끼니 밥을 할 때면 쌀바가지에서 한 홉씩 덜어 절미항아리에 담으셨다. 절미항아리에 그득해진 쌀 위에 복자인 듯 그림인 듯 한 친정어머님만의 표시를 그려 한지를 덮어 검정고무줄로 찡찡 동여매 보관하셨다. 이듬해 춘궁기에 부모님의 지혜로 우리 식구들의 식사를 해결하셨다. 광속에서 절미항아리였던 옹기로 된 달항아리는 우리 가족과 친숙하게 지냈는데 백색 달항아리가 보물이 될 줄이야.

지난겨울 여류화백의 `꽃과 항아리에 대한 詩'를 주제로 한 작품이 전시된 적이 있었다. 달항아리에 화려한 색채옷을 입힌 화백은 둥근 듯 기울어진 듯한 달항아리에 장미, 매화 등 다양한 꽃들을 화폭에 피웠다. 갤러리 정중앙 고혹적인 색채의 향연으로 달항아리에 장엄한 일출의 기쁨과 희망도 담았다. 그렇게 추상적으로 표현된 달항아리의 오묘한 매력 완전한 원형도 아닌 둥그스름한 비대칭인 원형이 매혹적이다. 옛날 어머님들은 항아리 위에 물을 떠 놓고 달을 보며 치성을 드렸다. 물동이 같기도 하고 장항아리인 듯한 달항아리 서민들 품속에서 주둥이가 깨지고 굽에 흠집이 생겨도 손때가 묻도록 동고동락했다. 풍요와 복을 가져다준다는 달항아리를 보면 어려웠던 여인들의 삶을 엿보는 것 같아 애련하다.

일상생활에서 허드레로 유용하게 쓰이던 도자기들이 어느덧 귀한 몸이 되었다. 유물이 깨지고 부서지고 세상이 제아무리 변해도 변치 않은 것 그것은 기록과 역사다. 흐르는 시간을 어찌 막으랴 친정집은 허물어지고 기울어져 기억 속에만 있을 뿐이다. 어머님께서 부엌 광에 두고 절미항아리로, 장항아리로 곁에 두고 삶이 녹아내리던 항아리들 시려오는 눈빛을 애써 돌렸다. 날개 단 듯 치솟는 가격만큼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는 달항아리지만 난 소소한 서민들 일상에서 호흡하던 그 항아리가 사뭇 그립다. 후세에 올바른 역사를 전하기 위해 기록하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 줄 끈 역사는 보존이고 기록유산이다. 역사를 간직한 달항아리 보름달처럼 고고한 아름다움이 온 누리를 비추길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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