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도자 문화의 과거와 현재
영동 도자 문화의 과거와 현재
  • 정춘택 충북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 2팀장
  • 승인 2024.03.03 18: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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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문화유산 이야기
정춘택 충북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 2팀장
정춘택 충북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 2팀장

 

충청북도에서 도자 가마터가 가장 많이 남은 지역은 어디일까?

충청북도문화재로 지정된 충주 미륵리 백자가마터가 있는 충주일까? 아니면 지금도 전통가마로 도자를 구워내고 있는 방곡도예촌이 있는 단양일까?

정답은 영동인데, 영동 지역에서 확인된 조선시대 분청사기 가마터와 백자 가마터의 수는 130개소에 달할 정도이다.

영동의 도자 가마터 가운데 특히 영동 사부리 분청사기 가마터가 가장 유명하다. 이 가마터는 1992~1993년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실시된 충북지방 도요지(陶窯址) 지표조사에서 확인되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황금소(黃所) 보현리(普賢里) 자기소로 추정된다. 또한 덕녕부(德寧府)의 명문이 새겨진 분청 사기발이 수습되어 주목된다. 덕녕부는 1455~1457년에 존속했던 단종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던 관청이므로, 영동 사부리 가마는 중앙 관아로 공납하던 가마였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덕녕부명 분청사기는 조선시대 분청사기 연구에 있어 편년의 기준을 제공하는 자료로서의 의미가 자못 크다고 하겠다.

영동 사부리 분청사기 가마터 외에도 영동 지역에는 120개소의 조선시대 백자가마터가 자리하고 있다. 그 분포를 살피면 영동읍 가리·임계리, 상촌면 고자리·상도대리·하도대리, 황간면 난곡리·노근리·서송원리, 용산면 미전리·시금리·청화리·한곡리, 학소면 봉소리, 추풍령 사부리·신안리·작점리, 학산면 지내리, 양강면 지촌리 등 영동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조선시대 백자가마터가 확인되었다.

이 백자가마터들은 대부분 17~19세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조업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는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전란의 복구와 대동법의 보급, 장시의 발달, 도자 장인의 입역제(立役制)의 변화 등의 이유로 전국적인 백자가마의 확산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확산일로 속에서도 한 지역에 120여기가 넘는 백자가마가 오랜 기간 활발하게 조업하였다는 것은 특히 주목되는 점이다.

한편 황간면 노근리와 용산면 한곡리에서는 고속도로의 개설, 산업단지의 개발 등의 사유로 백자가마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조사 결과 17세기 후반~18세기에 이르는 수수한 형태와 색을 바탕으로 한 백자발, 접시 등과 철화(鐵畵)로 그릇 표면에 점문·선문·초문·화문을 그린 백자가 출토되었다. 용산면 한곡리 백자가마에서는 백자와 함께 그릇 표면이 검은 흑유자기가 출토되었다.

영동의 조선시대 백자가마터의 윤곽은 노근리와 한곡리 백자가마의 발굴조사를 통해 어느 정도 드러났다 할 수 있다. 다만 각 가마 간의 연관관계 및 변화양상 파악, 도자사적 의의 도출 등의 총체적이고 심도 있는 연구는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영동 도자 문화의 현재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 영동군에는 영동읍 임계리, 상촌면 상고지리, 용산면 부상리 등 산골에 터를 잡거나 폐교를 이용하여 가마를 연 도예가들이 활발하게 도예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공방체험과 영동 내 초중고교를 중심으로 한 도예체험도 실시하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영동의 전통 도자와 현재의 도자와의 구심점이 약해 보인다는 점이다. 이 역시 영동의 도자문화 복원 계승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생각된다.

앞으로 영동의 도자문화에 대한 지속적인 조사·연구를 통해 전통의 계승과 발전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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