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하늘아래서
2월 하늘아래서
  • 정정옥 수필가
  • 승인 2024.02.20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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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정옥 수필가
정정옥 수필가

 

착시 현상일까? 회색빛 하늘에 분홍이 스며 있다. 손으로 콕 찌르면 분홍 물이 주르르 쏟아질 것 같다. 2월의 하늘이다.

아직은 차게만 느껴지는 먼 하늘에 설핏 보이기 시작한 분홍빛은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린다. 아마도 남녘 어느 하늘 아래에는 동백이 붉을 대로 붉어 수줍게 웃고, 밤이면 매화 향기가 바람을 타고 마실을 다닐 것이다.

두 팔을 힘껏 뻗으면 잡힐 것 같이 나지막하게 보이다가도 이내 멀게 느껴지는 2월의 하늘은 쨍하니 맑은 날보다 회색빛에 가까운 날들이 많다. 그리움이 가득한 하늘이다.

2월은 입춘 절기가 들어있고 설 명절도 들어있다. 해마다 입춘 무렵이면 부적처럼 붙어있던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이란 문구가 아직도 또렷하게 생각난다. 설날엔 엄마가 마련해준 노랑저고리와 다홍치마를 입고 사촌들과 친척 어른들께 세배를 다녔다. 대보름 하루 전날인 열나흗날에는 아버지를 따라 넓은 공터에 나가 액막이 연을 날려 보내기도 했다. 오곡밥과 여러 갖은 묵나물들로 이른 저녁을 먹고 어른들을 따라 논두렁에서 쥐불놀이를 하던 기억도 아슴푸레하다. 쥐불놀이는 논두렁이나 밭두렁에 서식하는 해충과 쥐를 없애고 한해의 농사를 준비하는 중요한 행사였기에 마을 사람들이 전수 나왔다. 이제는 그리움으로만 자리한 추억들이다.

이런저런 까닭으로 2월에는 그 넓은 하늘을 다 들여놓는 커다란 창가에 앉아서 마냥 하늘바라기를 한다.

중풍으로 3년을 누워계시던 친정엄마는 예순셋 되던 2월에 돌아가셨다. 엄마는 일찍이 밥벌이를 졸업한 아버지를 대신 그악스러운 가장이 되어야 했다. 궁핍한 살림에 대학 공부를 중단할까 봐 애면글면 뒷바라지하던 막내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까지 한 이듬해였다. 당신의 책무를 끝냈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렸던 것일까, 아니면 고단한 삶을 이어가기가 여전히 버거웠던 것일까. 1년여를 양방과 한방병원을 오가며 좋다는 치료는 다 했지만 가년스러운 엄마의 생을 이어주지는 못했다.

엄마의 피붙이들이 슬픔의 늪에서 허둥거리고 있을 때 올케는 예쁜 딸을 낳았다. 소멸과 생성은 우리 가족에게도 공평하게 적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방긋방긋 웃는 아가의 맑은 얼굴은 슬픈 눈의 우리에게 미소를 짓게 하고 서서히 평온한 일상을 마주하게 하였다.

나의 일터에는 온 하늘이 다 들어오는 넓은 창이 있었다. 한가할 때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로 소일하였다. 공기처럼 당연한 하늘이지만 계절마다 각각 다른 색과 감흥으로 다가오곤 한다.

1월부터 12월의 하늘 중에서 내게 으뜸인 것은 단연 2월의 하늘이다. 2월의 회색빛 하늘엔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당신의 몸은 부서져도 좋은 엄마가 있고, 한해의 액운을 날려 보내고 복을 기원하는 액막이 연을 만들어 주시던 아버지가 있고, 쥐불놀이를 하며 까르르 까르르 즐거워하던 친구들의 얼굴이 있다. 나는 2월의 하늘에 그리운 모든 이들의 얼굴을 그려 넣고는 한다. 그러면 금방이라도 품에 안을 수 있을 것 같은 설렘이 일곤 한다.

어느덧 2월도 중순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소멸하는 모든 것들 위에 새 희망의 촉을 틔우는 봄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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