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은 있다
비밀은 있다
  • 김진숙 수필가
  • 승인 2024.02.06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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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김진숙 수필가
김진숙 수필가

 

딸이 임신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어떤 아이가 나올지 궁금하다며 안달을 하던 딸은 임신 말기쯤 초음파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났다. 양수에 불고 이물질에 가려지긴 했지만 눈을 감고 입을 쭉 내민 모습이 제법 귀여운 태아의 사진이었다.

딸은 사진 속의 아이가 눈도 작고 코도 납작해 보인다며 아기가 안 예쁘면 어쩌냐고 한 걱정을 했다.

사진으로 먼저 만난 손녀딸이 반갑기는 했지만 나는 왠지 뱃속의 아이는 이런 만남이 싫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뱃속에 숨어서 비밀리에 몸을 키우고 있는데 얼굴 좀 보여 달라고 쿡쿡 찔러가며 촬영을 해대니 얼마나 성가셨겠는가? `으앙' 큰 울음 터트리며 멋지게 등장하려고 했는데 사진이 먼저 나와서 돌아다니고 있으니 얼마나 김빠질 일이겠는가?

금실 좋기로 소문난 부부를 잉꼬부부라고 한다. 잉꼬가 한 눈 팔지 않고 한 새만 사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잉꼬는 이처럼 아름다운 부부의 상징으로 영원히 남을 수도 있었다. DNA검사만 없었더라면 말이다. 어느 짓궂은 사람이 새끼 잉꼬 여섯마리의 DNA를 검사해 보았다고 한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세마리의 DNA가 달랐다고 한다. 어미 새가 외도를 했다는 것이다. 수컷은 그것도 모르고 암컷과 새끼들을 열심히 부양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비밀이 이렇게 낱낱이 밝혀진 걸 안다면 잉꼬부부는 기함을 할 것이다.

불륜을 들킨 앙큼한 암컷은 몹시 당황스러울 것이고 암컷의 배신과 구겨진 체면 사이에서 수컷은 심한 좌절을 느낄 것이다.

과학의 예리한 칼끝 앞에 세상의 오묘한 비밀들이 한 꺼풀씩 벗겨지고 있다. 옥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을 거라고 상상했던 달은 거칠고 황량한 모습으로 우리의 오랜 정서에 찬물을 끼얹었고 원하기만 하면 복제 강아지를 주문해서 받을 수 있는 손오공의 도술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인체의 비밀에 대한 도전이라는 주장과 각종 의학적 이유를 들어 인간복제는 법으로 금해지고 있지만 어디선가는 복제 인간이 만들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의심을 멈출 수가 없다.

텅 빈 속내 감추려고 싸고 또 감쌌는데/끝까지 달려들어 벗겨내는 저 모진 손/ 한 꺼풀

비밀쯤이야/남겨 둬도 되잖아/숨어 울 커튼 정도/쳐 줄 수도 있잖아//기어이 발가벗겨 백주에 내어 놓고/오히려/당신이 왜 울어/원망 한마디 못하게~~ 필자가 쓴 양파라는 시조의 전문이다. 사방이 감시자의 눈인 세상에서 몸 감출 곳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담아보고자 쓴 시였다.

오래 전 지인의 남편이 어느 여인과 다정히 어울리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지인으로부터 남편의 귀가가 늦어진다는 하소연을 들은 바 있어서 예사로이 보아 넘길 수가 없었다.

며칠간의 고민 끝에 `모르는 게 약'이라는 속담을 떠올리며 그 일은 나만 아는 비밀에 붙이기로 했다. 다행히도 지인은 사위 얻고 손주 보며 지금껏 별 탈 없이 잘 살고 있다.

친구의 애인이 좋아지는 마음을 숨기느라 애를 먹었다는 회사 동료의 첫사랑 이야기, 새엄마의 구박을 아빠에게 다 말할 수 없었다던 어느 대학생의 이야기, “오늘 사탕 세 개나 먹은 거 엄마한테는 비밀이야.” 손녀딸의 달콤한 비밀.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의 마음 속, 그 속에 누군가를 지켜주는 비밀 하나쯤은 품고 살아가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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