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늙은 절
곱게 늙은 절
  • 심억수 시인
  • 승인 2024.02.04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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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엿보기
심억수 시인
심억수 시인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운서산 장육사 일주문 앞에서 세속의 번뇌로 물든 마음을 가다듬고 도량에 들어섰다.

장육사는 나옹선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청아하게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운서교를 지나 단정한 돌계단을 오르자 흥원루가 길손을 맞는다. 흥원루는 아래층 보다 윗층이 크다. 단청이 없어 모습이 육중하다. 오랜 세월을 견뎌낸 듯 색바랜 목재의 색감이 도드라진다. 흥원루를 지나자 경내가 정갈하다. 빗질 자국이 선명하다. 대웅전은 금단청으로 화려하기 이를 데 없으면서도 색상이나 무늬가 장엄하고 거룩하다. 곱게 늙은 대웅전에 들려 가족의 안녕을 기원했다.

대웅전에 그려진 벽화가 눈길을 끈다. 주악 비천상과 좌우 벽에 그려진 보살상 벽화는 화려하면서도 묘사가 구체적이다. 주악 비천상은 천의를 길게 늘어뜨리고 당비파와 피리를 연주하는 모습이다.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한 자태의 우아함과 천 자락의 가벼움이 느껴지고 악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 천상계의 선녀처럼 아름답다. 황홀한 피리 소리가 들리고 지금 당장 벽을 박차고 날아오를 것만 같은 착각에 한참을 서성이었다.

대웅전 뒤편 계단을 오르니 나옹선사의 첫 수행지로 알려진 홍련암이다. 지공대사, 나옹선사, 무학대사의 영정이 각각 모셔져 있다. 인도 승려 지공은 나옹의 스승이고, 무학은 제자이다.

장육사를 창건한 나옹선사는 20세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자 문경 묘적암으로 출가했다. 양주 회암사에서 4년간 좌선하며 깨달음을 얻었고 원나라로 건너가 인도 승려 지공화상의 가르침을 받았다. 인도 불교를 한국불교로 승화시킨 역사적 인물로 기록돼 있다.

출가는 커다란 고통이 따른다. 모든 번뇌 망상을 이겨야 한다. 출가하여 정식구족계를 받기까지 만 5년이 걸린다.

행자와 수행의 길을 걸으며 사찰에서 염불, 목탁 치는 법, 예불의식을 배우고 강원이나 선원에서 4년 과정을 수학해야 한다. 스님의 하루는 고행이다. 새벽 3시에 목탁 소리와 함께 도량석으로 시작된다. 도량석이란 잠든 도량을 깨운다는 뜻으로 밤사이 고요 속에 잠긴 도량을 태양에 앞서 깨우는 장중한 수행자의 움직임이란다. 도량석이 끝나면 종을 치면서 염불한다. 그리고 범종각에서 운판·목어·법고의 타종이 끝날 무렵 법당에서 새벽 예불을 드린다. 오전 6시 아침 공양을 한다. 오전 7시 도량을 청소하는 운력을 시작한다. 사시(9시에서 11시)에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사시 기도를 드린다. 점심 공양을 하고 스님의 본업인 참선에 집중한다. 오후 5시 저녁 공양과 저녁 예불을 드린다. 오후 9시 좌선을 통해 하루를 마무리한 후 잠자리에 든다. 스님의 삶에 존경심이 절로 든다.

나옹선사가 치열하게 정진했던 수행처 홍련암에서 스님의 삶을 생각해 보며 선사의 선시 `청산가를 나직이 읊조려보았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욕심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말고/우주는 나를 보고 곳 없다 하지 않네/번뇌도 벗어놓고 욕심도 벗어놓고/강같이 구름같이 말없이 가라하네//”



운서산에 자리한 곱게 늙은 절 장육사 홍련암의 나옹화상이 나에게 집착과 욕심 벗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 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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