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같은 세상
그림 같은 세상
  • 전현주 수필가
  • 승인 2024.01.31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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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전현주 수필가
전현주 수필가

 

창문 너머로 드넓은 갈대밭이 보인다. 저 멀리 갈대가 희미해지는 곳을 지나면 작은 마을이 있고 마을 뒷산에는 어느덧 울긋불긋 가을빛이 내려앉았다.

하늘에는 고래를 닮은 커다란 구름이 신비한 빛을 내며 떠 있다. 바람이 한 줄기 시원하게 불어오자 갈대는 일제히 바스락 소리를 내며 제 손을 크게 흔들어 자신이 그곳에 있음을 알린다. 확 트인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새 나는 갈대숲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가에 앉아 졸졸거리는 물소리를 듣고 있는 듯하다.

눈을 돌리면 다른 방향의 창을 통해 이웃집 정원이 들여다보인다. 온갖 색의 자잘한 꽃들이 마당에 가득하다. 저 집의 주인은 자연스러운 삶을 추구하나 보다. 꽃밭 사이로 난 좁은 오솔길을 제외하고는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꽃이 빽빽하다. 꽃들은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가녀린 제 몸을 서로 기대어 부대끼며 피어있다. 꽃 사이로 파란색의 물뿌리개가 언뜻언뜻 보이는데 세룰리안블루와 퍼머넌트옐로오렌지의 보색 대비가 꽃만큼이나 아름답다.

내 방에는 창문이 많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마다 창을 하나 낸다고 생각하곤 한다. 완성한 그림을 벽에 걸면 시선은 그림 속 풍경 너머를 향해 끝없이 달려간다. 그 풍경 속에 내가 있다. 그곳에서의 나는 좀 멋진 편인데 가끔은 모자를 쓰고 있고, 작은 일 따위에 마음 졸이지 않고 주로 대범하다.

내가 들어가 머물러야 할 곳이기에 어떤 그림을 그릴까 천천히 고민하는 시간이 참 좋다. 마음이 편안한 시기에는 정물화를, 혼란스럽고 바쁠 때는 풍경화를 그리는 경우가 많다. 멀리 떠나고 싶어서일까. 짬짬이 그림을 그리며 작업 중인 그림에 빠져들어 있는 시간 동안 천국과도 같은 평화를 맛보기도 한다. 그림은 아무 말 없이 내 마음을 다독여 준다.

팔을 쉽게 뻗을 수 있는 오른쪽 벽에 물감을 걸어놓고 쓰는데 제일 먼저 닳는 색은 늘 번트엄버다. 짙은 고동색이라고 해야 할까. 암갈색이라고 해야 할까. 검은색에 가까운 밤색인데 이탈리아 움브리아 지방의 흙을 구워 만든 물감이라고 한다. 번트엄버는 거의 모든 색에 스며들어 색을 깊고 차분하게 해 준다. 특히 그늘진 곳을 그릴 때나 우거진 숲을 표현할 때 아이보리 블랙과 초록 계열의 색과 섞어 쓰면 효과 만점이다. 늘 어수선한 내 마음에도 오일을 한 방울 살짝 찍어 펴 발라 톤다운하고 싶은 색이다.

그저 그리는 순간들을 즐길 뿐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별개이다. 잘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림은 나를 캔버스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한다. 내가 그리고 싶은 대상을 마음먹은 대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은 초라한 내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던 것과 비슷하다. 내가 노래를 잘 못 부르는 것도, 피아노 실력이 더 이상 늘지 않았던 것도, 결국 접어야만 했던 오랜 꿈도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그러나 경지에 오르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간절한 바람인가.

요 며칠 회벽에 드리운 사과나무의 그림자 부분을 그리고 있다. 흙물이 튀고 이끼가 낀 오래된 벽 위에서 의도와 우연으로 마주친 물감들이 사과나무가 되고 그림자가 된다.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색의 조합이 사과나무 가지 끝에서 바람에 너울거린다. 그럴 때면 캔버스 위의 모든 색깔이 일제히 미세한 조각으로 쪼개지며 색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그 순간에는 그 어느 색도 그곳에 있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없다. 가슴 벅찬 자유다.

사람들은 멋진 사진을 보면 그림 같다고 하면서 잘 그린 그림을 보고는 사진 같다고 한다. 완벽한 직선도 순수한 흰색도 없는 세상이 너무도 아름답다. 그림 같은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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