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속에 상처가 산다
가족 속에 상처가 산다
  •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 승인 2024.01.29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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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

 

낮게 깔린 먹구름 아래 흰색의 외벽이 습도로 창백했다. 이월이 가깝다 해도 아직은 흰 눈 깨끗한 추위가 어울리는 겨울이다. 추적이며 비가 내리고 바람은 시리게 지나갔다. 따듯한 차 한잔을 마시면 시린 목이 더워질까, 작은 온기에도 감동할 수밖에 없는 계절, 뜨거운 생강차를 마시며 마당 한쪽에서 묵상에 든 소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마당으로 거침없이 들어오는 승용차 소리에 깊은 상념에서 깼다.

낯익은 손님이다. 우산도 쓰지 않고 비를 맞으며 들어온 중년의 여자는 내 손님이 아니다. 사업상 남편과 거래하는 사람인데 나를 만나러 왔다고 했다. 따듯한 코트를 입었지만 추워 보였다. 이유를 묻지 않고 그녀에게도 생강차를 권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지난해 늦가을, 세 번째 수필집을 출간했다. 모든 게 부족한 나는 누구에게도 작품에 대한 평을 부탁하지 못했다. 소심한 탓인지 주위 사람에게도 선득 주지 못하고 망설였다. 몇 권 책상 위에 놓여있던 것을 남편이 그녀에게 한 권 주었나 보다. 모두 읽었다고 했다. 그리고 가슴에 응어리진 속마음을 풀어놔도 이해해 줄 것 같아서 왔다고 했다.

연애결혼을 하고 내외가 친정아버지의 사업을 도왔단다. 건축자재를 생산하는 거친 일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장인은 사위를 나무라고 탓했다. 처음엔 잘 참고 견뎠지만, 시간이 갈수록 장인의 횡포는 커지고 결국 남편은 처가에서 받는 부당함을 몇 곱절로 아내에게 되돌려주면서 괴롭히는 데 삶의 목적을 뒀다. 어른 노릇을 하지 못한 장인에게서 받은 깊은 상처를 안고 성난 짐승처럼 날카로운 이빨로 아내를 물고 흔들었다. 둘 중 한 사람이 죽어야 끝날 수 있는 싸움이었다. 가정이 지옥이 된 것이다.

인간은 목적에 따라 변화한다. 열심히 해도 늘 무시를 당했던 그녀의 남편은 결국 처가의 사업을 거덜 내고 스스로 세상을 떠나며 복수를 끝냈다. 그녀는 말했다. 남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놀라지도 않았고 눈물도 나오지 않았단다. 지독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어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원망스러웠던 친정아버지도 떠나고 오랜 세월, 그녀는 혼자 어린 자식들을 키웠다. 빚더미에 올라앉았던 사업체를 운영하며 많은 빚을 갚았고 아직도 갚는 중이라고 했다. 무시로 벼랑 끝으로 내몰리던 한 여자의 삶을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만 끄덕였다.

프랑스의 사상가 앙드레 모루아는 `가정은 사람이 있는 그대로 자기를 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했다. 꾸미지 않는 본래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 줄 수 있는 사이이며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가족'이라고 했다. 현실은 과연 그런가. 어떤 이는 가족은 무를 수도, 내칠 수도 없는 관계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가족 앞에서 극단적인 소외를 경험하기도 한다. 전생의 인연 따라 가족도 이어지는가.

인연에는 악연도 있고 호연도 있다. 삶에 방해가 되는 인연이 악연이고 도움을 주는 인연이 호연이다. 피붙이라고 모두 호연은 아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인생을 척박하고 살벌하게 만든 악연이었지 싶다.

비 끝에 눈이 내린다. 다시 강추위가 왔다. 찬바람이 목청을 높이는 추위 속에서도 그녀는 환한 표정으로 용감하게 토목 현장을 누비고 다닌다. 어쩌면 지금이 그녀에겐 가장 편안한 시절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하는 것, 삶에서 다시 삶을 창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의 희망이 아닐까.

나는 소망한다. 그녀에게 축복만 가득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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