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꽃
작은 꽃
  • 김진숙 수필가
  • 승인 2024.01.23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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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김진숙 수필가
김진숙 수필가

 

“언니 수저 놓은 것 좀 봐라. 수저는 저렇게 가지런히 놓아야 하는 거다.” 50년도 더 된 옛날, 돌아가신 이모부가 당신 딸들 앞에서 나에게 하신 칭찬이다. 밥상위에 수저 놓는 것이 무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 먼 옛날의 일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걸까? 살면서 몇 번쯤은 칭찬도 받았을 텐데 유야무야 다 잊히고 유독 그 별 거 아닌 칭찬이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애들이 유치원 다닐 때 가끔씩 반장 명찰을 달고 왔다. 숟가락 반장, 의자 반장, 책상 반장, 우스꽝스런 이름의 반장 명찰을 교대로 달고 오며 아이들은 꽤나 으스댔다. 뛰어난 역량 없이도 할 수 있는 일, 그래서 조금 부족한 아이들도 충분히 해 낼 수 있는 반장 자리를 만들어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여주고자 했던 원장님의 의도였을 것이다.

왠지 모를 우울감이 들 때, 내 존재가 하찮아 보일 때,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을 소중히 대해 주라는 것이다. 물도 예쁜 컵에 따라 먹고, 음식도 좋은 그릇에 담아 먹고, 주변을 깨끗이 정돈하고, 나를 단정히 꾸며 보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 우울감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설마 하는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큰 능력이나 준비 없이도 해 볼 수 있는 일이기에 어느 한 날 이 일을 시도해 보았다. 어질러져 있던 침대를 잘 정돈하고, 예쁜 그릇에 양배추와 사과를 곁들인 토스트를 담아 식사를 하고, 커피 한 잔을 아주 여유롭게 마시고, 걸음걸이도 조신하게, 수도꼭지 하나 트는 손놀림도 우아하게 하다 보니 그 날 아침 확실히 기분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구질구질 하다고 느꼈지만 혹시나 해서 끼고 있던 물건들을 버리고, 자주 앉는 책상과 늘 보는 거울, 문갑위의 먼지를 정성스레 닦은 다음 소파에 앉아 시집을 읽고 있으려니 내 자신이 조금은 근사해진 기분도 들었다.

최고의 능력에 최고의 노력을 곁들여 어느 한 분야에 우뚝 선 사람들을 종종 본다. 그 능력과 노력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지만 애석하게도 우리에겐 그만한 능력이 없다. 그렇다고 인생의 만족도조차 그들에게 뒤떨어져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추앙해 주지 않아도 내 스스로 만큼은 나를 추앙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김철순 시인이 쓴 `작은 꽃'이라는 동시가 있다.

학교 가는 길옆에/작은 꽃이 피어 있었다.//작은 꽃은 부끄러운지/자꾸만 풀숲에/몸을 숨기려 했다.//괜찮아/작아도 너는 꽃이야/내가 말해 주었다.

작아도 우린 꽃인 것이다. 내 분수에 맞는 작은 꽃을 피우면 되는 것이다.

말썽꾸러기 손녀딸들이 방학이면 집에 놀러오곤 한다. 잘 울고, 고집도 세고, 시시때때로 싸우는 이 아이들을 다스리기가 참 쉽지 않다. 그래서 내가 찾아낸 방법도 이 아이들의 가치를 높여 주는 일이었다. 오늘은 싸움을 세 번 밖에 안 해서 고마워. 언니라서 많이 참은 거 알고 있어. 할머니가 먹여 주지 않아도 밥을 잘 먹어줘서 고마워. 덕분에 할머니가 무척 편안했어. 엄마 없이도 잘 있어줘서 고마워. 우리 손녀딸이 다 큰 것 같아서 흐뭇했어. 그렇게 말해주면 아이는 얼굴 가득 만족의 웃음을 짓곤 한다. 입 꼬리에 걸린 그 웃음이 너무 예뻐서 덥석 안아주면 작을 팔을 벌려 함께 안아준다. 내가 느낄 수 있는 최고치의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다.

작은 꽃도 그 자체로 예쁘다. 예쁘게 보면 더 예쁘다. 꽃이라고 불러주면 더 활짝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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