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심는 이유
꽃을 심는 이유
  • 박윤미 수필가
  • 승인 2024.01.18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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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박윤미 수필가
박윤미 수필가

 

화원 앞을 지나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 노란꽃카라 화분 하나를 사서 내 학급 교실에 두었었다. 학생들도 그게 좋은지 아침마다 물주고 창가에 비치는 햇살 따라 옮겨놔 주며 보살피는데, 온갖 정성에도 세가 점점 약해지기만 했다.

다시 돌아온 봄, 과학실 한구석에 놓여있던 화분에 흙이 불룩 올라온 걸 발견했다. 바짝 마른 흙을 밀어 올리며 빼꼼히 나와서 굽힌 허리를 펴는 새싹들, 카라는 새로운 잎들을 계속 내고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더니 어느새 화분에 한가득하다.

카라는 보통 5~6월에 하얀 꽃이삭이 나오고, 노란 화포가 꽃이삭을 감싸면 아주 우아해진다. 그러나 내 카라는 가을이 지나 첫눈이 오기까지도 결국 꽃을 보여주지 않았다.

2015년 2월에 수필 교실에 처음 갔었다. 좀 이상한 얘기지만 글쓰기를 배워보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었다. 지인이 다닌다기에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한번 들러본 것이다. 그런데 이 우연한 첫 만남 이후, 나는 글쓰기라는 화분 하나를 내 마음에 들여놓았다.

5년간의 글공부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도 쓸 수 있지 않을까? 한번 해 볼까?' 하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내가 엄마가 되던 때를 생각했다. 엄마의 자격을 갖추고 나서 아이를 낳은 것이 아니라 아이를 낳자 엄마가 되어 갔다. 그런 나만의 논리로 용기를 내어 2019년의 해가 저무는 12월, 한국수필에 등단까지 하게 되었다.

그 후로 또다시 많은 시간이 흘렀다. 머릿속에서만 수많은 글을 쓴다. 그러나 손끝으로 나오기가 어렵다. 눈을 감으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줄줄이 이어지다가 눈을 뜨면 사라진다. 샤워할 때면 머릿속은 온통 파티다.

그러나 욕실 문을 나서면 현실이다. 많은 이야기가 머리에서 가슴에서 맴돌다 흩어진다. 내게 재주가 있기는 한가? 당당한 수필가나 작가라는 이름이 여전히 언감생심인 것은 내 화분을 충분히 열심히 가꾸지 않고 있음을 누구보다 스스로 알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에 법륜스님의 강연에서 사연자가 삶의 소명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질문했다. 스님은 아주 가볍고도 즉각적으로 삶의 소명 같은 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냥 자기가 정하여 사는 것이라 하셨다. 얼마나 간단하고 명쾌한가, 사는 법은 내게 달렸다는 것이다.

누구든 좋은 결실을 원하지만, 좋은 열매를 영글게 하는 방법을 모르거나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간혹 결실을 향한 마음조차 잊을 때가 있다. 2024년의 새해가 밝았다.

`마음을 여는 글밭교실'에서 지낸 지난 9년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화려한 꽃은 피우지 못했지만 누가 뭐래도 열심히 나를 가꾼 시간이었다.

시들어 버린 잎들을 따고 화분을 뒤집어 알뿌리를 캤다. 카라는 겨울 동안 충분히 저온 처리가 되어야 다음 해 꽃을 피울 수 있다고 한다. 지난해엔 그다지 춥지 않은 실내에 있어서 꽃을 피우지 않았던가 보다. 알뿌리는 덩이덩이 여러 개로 늘어났고 실해져 있었다. 며칠 물기를 날리고 신문지에 싸서 서늘한 곳에 두었다. 봄이 오면 심어서 노란 꽃이 피길 다시 기대해 봐야겠다.

대나무에도 선인장에도 꽃이 피고, 다육식물에도 꽃이 핀다. 매년 또는 언제든 흔하게 개화하는 식물에 비해 꽃이 드물기는 하지만 모든 식물에는 꽃이 있더라. 내 글밭 화분 속에 알뿌리가 살아있음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나의 성장이 아니겠는가? 노란 꽃 한번 피워보겠다는 선명한 소망을 가져보는 것이 나의 큰 성장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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