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안에서
버스 안에서
  • 반지아 청주 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 승인 2024.01.17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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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반지아 청주 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반지아 청주 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가만히 생각하면 항상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살았던 것 같다.

특별히 엄청난 걸 이루며 살지는 못했지만, 한순간이라도 무얼 하지 않으면 내 존재가 쓸모없어지는 것처럼 동동거렸다.

그래서였을까. 오래오래 달리는 버스 안에 앉아 있으면 그렇게도 마음이 편했다. 많은 사람이 쉴 새 없이 타고내리는 시내버스가 아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그 누구도 타지 않고 내리지 않는, 예상할 수 있는 목적지까지의 소요 시간 동안은 그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 외지로 향하는 버스를 말하는 것이다.

버스 안, 내 자리에 앉으면 마치 어떤 걸 해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공식적으로 허락받은 것만 같은 이상한 편안함이 온몸을 감싸며 거의 매 순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살아온 몸이 서서히 이완된다. 물론 그 안에서도 누군가는 밀린 잠을 자고 누군가는 책도 읽고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드라마를 몰아보는 이도 있다. 하지만 상관없다.

버스라는 공간 자체가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창밖을 바라봐도 되는 무수한 이유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눈이 나빠질거야, 멀미를 할 수도 있겠지.

난 왜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어떤 의미 있는 행위를 하지 않고 얼마간의 시간이 허무하게 흘러가 버리면 그 죄책감을 애초에 나에게 주어졌던 시간보다 더 오래도록 껴안고 괴로워하는 그런 사람.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세월이 약이라는 말은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자유가 주어지면 본능적으로 뭘 해야 뿌듯할지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려보지만, 그 끝에는 가끔 `아무것도 하지 말자, 평소 보고 싶었던 프로그램을 몰아보자, 그렇게 해도 아무 문제 없어'라는 여유가 차츰차츰 생겼기 때문이다.

가만히 죄책감의 근원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쩌면 내가 보내온 과거의 어떤 한 시점에 나는 끊임없이 나라는 존재를 증명해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는 사람이 마치 서서히 소멸해 버릴 것만 같아서 그것이 숫자이든 종이 쪼가리든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했다. 그리고 해내야만 했다.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도 빛나고 귀하다고 말해주던 눈과 입들은 어느 순간부터 어떤 존재가 가져오는 어떤 반짝이는 걸로 그 존재의 의미를 분류하고 판단했다. 그 기억이 너무 오래고 강렬해서 여태 벗어나지 못했다.

2024년 새해가 밝았다. 아마 모두가 새해 목표를 하나쯤은 가지고 신년을 시작했을 것이다.

어떤 걸 얻든 버리든, 남 앞에 내놓을만한 성과를 물어다 줄 기세 좋은 새해 소망 같은 거 말이다.

나도 있다. 모든 곳 모든 시간을 버스 안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내기. 즉, 아무것도 안 해도 괜한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기. 하지만 어쩌면 난 이미 목표를 향한 발걸음을 떼지조차 못했는지 모른다.

버스 안에서 계절에 맞게 발가벗은 나무들이 빽빽한 창밖을 바라보다 막을 새도 없이 떠오른 첫 문장에 홀려 써 내려간 글이 여기까지 왔으니 말이다.

이 글이 완성되면 무언가 그래도 했다는 성취감과 안도감에 남은 한 시간 남짓의 시간은 조금 편안하게 보낼 수 있겠지.

나만 이런 걸까. 누구의 잘못인가. 이러다 죽는 순간에도 수의가 얼마짜리냐며 숫자로 값이 매겨진 채 태워지는 건 아닌지 두려워진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간절히 희망한다.

올 한해가 모두에게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는 시간으로 채워지기를. 혹자가 부르짖는 존재의 가치가 티끌만큼이라도 실현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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