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킨다는 것에 관하여
삼킨다는 것에 관하여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4.01.16 16: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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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엄마, 내가 누군지 알아?”

초점도 흐려진 눈동자가 떨린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 어머니의 마음 집에 내가 살긴 할까. 나는 어머니에게 언제 부턴가 “개울건너 아줌마”가 되어 버렸다. 흔들어도 보고 귀에 대고 연신 소리도 질러 본다. 하지만 대답은 욕 몇 마디. 그래도 좋았다. 그렇게 욕이라도 어머니의 목소리면 되었다. 언제 까지 들을 수 있을지 이제는 알 수가 없다.

“뚜, 뚜, 뚜”

중환자실에서 들리는 것이라곤 어머니의 심장을 체크하는 기계음 뿐, 눈도 이제는 뜨지 않으신다. 억지로 눈을 벌려가며 뜨게 하지만 아주 잠깐이다.

자글자글 주름진 작은 얼굴, 훈장인 듯 다글다글 핀 검버섯, 조금이라도 힘을 줘서 만지기라도 하면 잘못 될까 싶어 조심조심 어루만졌다. 어머니의 마지막 길 앞에서 나는 차마, 아니 감히 눈물도 흘릴 수 없었다. 무언가가 목을 꽉 조이는 듯 고통이 몰려 왔다.

우리 사남매는 한 번도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는 것도 울음을 토해내는 것도 보지 못했다. 작은 오빠가 서른 살 제 생일이 있던 6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생이 끝났던 날도 어머니는 끝내 울지 않으셨다. 자신의 울음이 정말 작은 아들을 영영 보내는 것 같아 그리 눈물도, 슬픔도 삼키셨을까.

어쩌면 삼켜버린 그 고통이 그때부터 조금씩 어머니의 정신까지 먹어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아침이면 작은 오빠의 밥을 챙기고 저녁이면 대문 밖에서 오지 않을 자식을 언제나 기다리느라 서성였다. 그렇게 일 년여가 지나자 어머니는 모든 것을 인정하셨는지 더 이상 작은 아들을 위한 그 무엇도 하지 않으셨다. 더 이상 남은 자식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셨을까.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셨을 때도 어머니는 자식들에 짐이 될까 당신이 아버지를 집에서 돌본다며 걱정 말라고 하셨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고, 잠시 소홀하면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는 아버지를 어머니는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아버지를 보내고 몇 년 후, 어머니는 더 이상 자신이 할 일이 없어졌다 생각하셨는지 정신 줄을 놓고 마셨다. 그런데 정작 그런 어머니를 모실 자식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 자식들은 요양원에 모셔 놓고 찾아뵙는 것이 다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요양원에 계시는 동안이 어머니가 제일 행복했던 때였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어머니를 뵈러 가면 작은 오빠와 아버지가 어머니 곁에 머무르고 계셨다.

누군가에게 슬픔을 보이고 싶지 않을 때 우리는 `눈물을 숨겼다, 혹은 눈물을 참았다'라는 표현을 한다. 그런데 그런 말보다 사실 더 간절한 말이 있다. 가령, 가슴을 죄어오는 답답함에 숨도 쉬기 버거울 때는 `삼켰다'라는 표현이 깊은 슬픔을 표현하기에 더 적확하지 않을까. 어머니의 지난한 삶은 눈물을 흘릴 새도, 슬픔에 겨울 때도 어디다 풀을 새도 없었다. 하늘을 보는 것도 호사라 여겨 그저 땅만 보고, 앞만 보고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했다.

어머니가 끝내 작은 아들과 지아비가 있는 곳으로 가시던 날, 나는 눈물을 삼키지 못하고 토해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어머니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서러움과 고통이 밖으로 터져 나왔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어머니의 그 단단한 마음을 감히 흉내도 못 낼 일이다. 어머니가 돌아 가신지도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럼에도 왜 세월의 더께가 쌓일수록 그리움이 더한지 모르겠다. 어머니, 세상에서 이보다 더 따뜻한 말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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