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룰
나만의 룰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4.01.14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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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나는 치(癡)자(字)를 주렁주렁 달고 산다.

음치, 몸치, 길치, 기계치….

노래방이나 흥이 있는 자리를 가면 불안하다. 슬쩍 뒤로 빼기 일쑤다. 어디서나 노래를 잘하고 싶은 음치다.

춤을 잘 추는 사람도 마냥 부럽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아 춤은 고사하고 좋아하는 운동이 하나도 없다. 학교 다닐 때도 체육 시간이 제일 싫었다. 뜀틀 앞에서 겁을 먹어 주춤하고 날아오는 공이 무서웠다. 몸이 제대로 따라주지 않는 몸치를 어쩌랴.

그이가 운전하는 차를 옆에 타고 자주 가던 길이었다. 운전면허를 따고 그곳을 찾아가는데 헤맸다.

1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30분이나 걸려서 간 적이 있다. 거기가 거기 같아서 헷갈린다.

더듬더듬 가는 장소는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길치다.

또 어떤가.

사용하는 컴퓨터가 말썽을 부리면 당황부터 한다. 내가 최대한 해볼 수 있는 일이 컴퓨터를 껐다가 다시 켜는 일이다. 어디를 살펴야 할지 깜깜한 기계치다.

공을 가지고 하는 운동은 다 싫다. 농구, 배구, 피구, 하물며 탁구까지 내겐 공포다.

그런 내게 그이는 골프를 배우라고 닦달한다.

주위에 부부가 함께 골프를 하는 이들이 많다. 부부끼리 라운딩을 가고 싶은데 나 때문에 그이가 못 가서 서운한 눈치다. 백수가 되고 나니 그이는 작정하고 무언의 압박을 해온다. 골프채 풀세트를 사서 내 앞에 갖다 놓는다. 이제 물러설 곳이 없다.

더는 미룰 핑계를 대지 못한다. 거금을 들여 업어 온 골프채가 나를 압박하고 있으니 말이다.

2월부터 배우기로 했다. 슬그머니 검색창에 골프를 쳐 본다. 골프에 있어 룰과 매너는 초보 때부터 제대로 배워야 한다고 되어 있다.

샷을 한 후 패인 자리에 떨어져 나간 뗏장을 다시 채워 넣거나 흙을 채워 넣는 것이 예의다.

골프장의 잔디 관리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골프를 시작하지 못한 나로서는 `40초 룰'이 눈에 들어온다.

공을 한번 치는 적당한 시간을 40초로 제한하고 있다. 뒤의 팀에 밀리지 않는 진행을 위해 적당한 시간으로 보는 것이다.

룰은 운동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의 삶 자체에 스며 있다.

얼마 전 일본의 하네다공항에서 항공기가 충돌하며 화재가 발생한 사고가 있었다.

여객기 뒷부분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았고 기체는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TV에서 뉴스로 보도되고 있는 광경을 보다가 놀라 식겁했다. 다행히 탑승객 379명 모두가 무사히 탈출했다는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불이 나자 승무원들의 침착하고 질서정연한 움직임이 대형 참사를 막은 것이라 한다.

일본 언론은 탑승객 전원이 빠르게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90초 룰” 덕분이라고 평가했다. 지시에 따라 동승자와 수하물을 찾지 말고 일단 다 버려야 가능한 일이었다. 탈출 슈터인 기내에 펼쳐지는 미끄럼틀이 뾰족한 물체로 뚫어지면 공기가 빠져나가므로 신발을 다 벗고 탈출해야 한다. 항공사에서는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90초 이내에 승객들을 기내에서 탈출시키도록 훈련받고 있다. 이 규정이 기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도 보이지 않는 룰이 있다. 이렇게 서로가 그것을 지키며 살기에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음이다.

너와 내가 더불어 어우렁더우렁 살아갈 수 있는 법칙이다. 나는 힘든 상황에 부딪힐 때면 결정을 질질 끌지 않는다. 이내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기억한다. 행복을 향해 가는 길을 헤매지 않기 위한 나만의 규칙이다. 어떤 역경도 이겨내며 예까지 올 수 있었던 나를 지탱한 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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