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테
나이테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 승인 2024.01.09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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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새해가 시작되고 날짜가 더해간다. 낮 길이가 길어지고 입춘까지 채 한 달이 안 남았다.

새해라 하지만 설렘보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앞선다. 헤쳐나가야 할 덤불이 숲을 이루고 있다. 얼기설기 복잡하게 얽힌 풀 수 없는 덤불이다. 폭설이 쏟아진다 한들 폭삭 주저앉을 만한 상황이 아닌 듯하다. 칡덩굴, 환삼덩굴에 가시박 덩굴까지 나무의 종류, 크기를 가리지 않고 엉키었다.

한해가 지나면 생기던, 여지없이 생기던 나이테였는데, 여름내 왕성하게 자라던 나무는 한겨울에 나이테를 짙게 하는데, 폭은 가느다란 선인데, 성장이 멈추었는지 나이테가 생기지 않고 있다.

가시덤불에 가려 자라지 못해서일지, 자라기를 포기해서일지는 모를 일이다.

나이테의 진한 테두리는 힘든 고비를 넘었을 때 생긴다. 한고비 넘긴 것이다.

진한 테두리를 벗어나면 급격히 밝아진다. 밝고 뽀얀 속살은 한참의 시간을 살찌운다. 넘어야 할 장애물이 높았기에 사력을 다했기에 이젠 충분히 쉬라 주어진 시간이다. 쉬는 시간에 제대로 찌어보리라 마음먹은 듯하다. 그렇게 찌는 사이에 피부는 갈라지고 터져 나간다. 그래야 하는데 지금, 이 시각 쉴 시간이 언제인지 잊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에게는 끊임없는 시련이 주어진단다.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시련은 끝난 게 아니란다. 시련이 오고 여차저차 극복하고, 한숨 돌리고 꽃밭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또 헛발을 디뎠던, 억지로 밀쳐졌던, 구렁텅이라는 뭐 그런 이야기다.

단순 흥미 요소라기에는 가슴 졸이며 몰입하게 하는 잘 짜진 장치이다. 어떨 때는 꼭 저래야 하는가 하고 짜증 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될 시련은 없다는 것이다. 소소한 대화 속에서 불거진 충돌이 커다란 시련이 되고,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으며 사건이 종료되는 상황이 전개된다. 드라마도 아닌데 왜 현실에선 끊임없는 시련이 닥쳐오는지 모를 일이다.

나이테를 보면 시련의 과정이 얼마만큼이었는지 가늠이 된다. 나이테가 좁으면 시련의 과정에서 풀어야 할 실마리가 잘 풀리지 않았으며, 한 해가 지나지 않았음에도 두 개의 나이테가 있는 것은 한 해에 두 번의 시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련의 과정을 극복함에 나이테가 더 생긴 것이다. 거짓 나이인 셈이다. 바위틈이나 벼랑 끝에 자라는 나무에는 나이테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 성장을 멈추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뿌리를 내린 이상 아예 자라지 않는 나무는 없다. 죽지 않는다면 산다는 것이니, 더디지만 나이테는 간간이 만들어질 것이다. 물론 좋은 터를 잡아 물이 풍족하고 바람이 제법 친한 손짓을 해준다면, 비옥한 거름을 날라다 줄 것이니, 매년 고른 나이테를 만들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라는 나무가 몇 그루나 될까? 보통은 힘겹게 뿌리내리고 힘겹게 커 나가는 나무들일 것이다.

몇 년의 시간, 어쩌면 간간이 나이테가 생겼겠지만, 인지하기 어려운 나이테다.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반복되는 시련은, 매번 극복해야 할 과제가 된다. 나무는 속으로 시련을 새긴다. 극복하며 기억을 새기고 혈기 왕성했던 시간을 새긴다. 그러면서 굵어진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어떨 때는 어찌 이리 컸을까 싶을 정도의 폭풍 성장을 하기도 한다. 퍼뜩 드는 생각은, 참 관심 없었다는 것.

나이를 먹는다는 건, 시련을 극복해 나간다는 것은 현실에 처한 한계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가는 일이다. 물리적 시간이 아닌 카이로스의 시간이 된다.

물리적 궤적이 아닌 앎의 끝이 없는 아름다움으로 채워가는, 그래서 더 울창하고 다양한 숲을 이룰 수 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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