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마
나의 애마
  • 김은혜 수필가
  • 승인 2024.01.08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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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은혜 수필가
김은혜 수필가

 

떡국 그릇 숫자가 많아지자 십수 년 나의 동반자인 애마와 그만 헤어지란다. 그가 내게 오던 날의 첫인상은 검정 바탕에 푸른색이 약간 섞여 근엄하면서도 무게가 있어 보여 멋스러움에 한눈에 반했었다. 중형 옵티마, 충북 31두 2982를 교회로부터 선물 받던 날은 너무도 감격스럽고 황홀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때의 기쁨은 잊을 수가 없는데, 아직도 첫 만남의 감격이 이렇게 생생한데 헤어지다니.

가족의 성화에 못 이겨 마지막 여행을 하기로 했다. 이별 여행을 어디로 가나 고민하다 애마를 처음 만나 자신 있게 갈 수 있었던 곳 아버지와 함께 살던 친정집으로 결정하고 집을 나섰다. 그때는 낯익은 길인데도 어찌나 긴장했던지 콩닥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앞만 보고 달리느라 주변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었지. 오늘은 시리도록 푸른 하늘도 보이고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에 이따금 몸집이 작다는 이유로 주인에게 버림받은 배추 포기도 보인다.

겨울 햇살이 내려앉은 들녘을 달리며 지난날을 돌이켜 본다. 남편이 은테를 준비하는 눈치가 보여 차 한 대는 필요하지 않겠나 싶어 뒤늦게 면허증을 취득했다. 애마를 만나자 젊은 신사에게 걸맞지 않은 `경로 초보'라는 이름표를 등에 달아 주고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노인대학 어르신들을 섬기기 위해 매주 먹을거리를 실어 나르기도 했고, 목사(남편)님을 모시고 성도들의 가정을 방문할 때 기사가 되어주기도 했지. 나는 네가 있어 내게 맡겨진 소임을 다 할 수 있어 행복했다. 하지만 동반자 너는 나를 만나 행복했었을까? 탁 트인 도로에 나와도 100Km를 넘지 않으려고 붙잡는 나에게 얼마나 할 말이 많았겠나.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너의 삶은 훨씬 화려했었을 것 같다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크다.

내 나이 58세가 뭐가 많다고 경로 초보가 뭐야, 돌이켜보니 참 미안한 짓 같다. 미안한 것이 어디 그뿐인가. 시원한 고속도로 한번 달려주지 못한 것도, 서툰 솜씨로 뒤꽁무니에, 앞이마에 고운 네 몸에 흠집을 만들어주는 실수를 좀 많이 했어야지.

전방을 잘 살피지 못해 상대방 일 톤 트럭에 부딪혀 왼쪽 눈이 빠져 애꾸눈을 해준 적도 있었지. 눈 하나를 잃은 그날은 바라보기가 너무 민망해 집으로 데려올 수가 없어서 생소한 곳에 홀로 둔 적도 있다. 그날은 심장이 멎어 버릴 것 같은 아픔으로 밥맛을 잃었을 뿐더러 잠 못 이루었다.

폭우로 한 치 앞이 안 보여 너를 인도할 수 없어 무작정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기도 했고, 갑자기 쏟아진 눈길이 미끄러워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지 못해 몇 번이고 재도전할 때 몰려오던 두려움 때문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체험도 했었잖아. 좁은 공간에서 데리고 나오지 못할 때는 나의 기술 없음을 원망하기에 앞서 왜 그리도 몸집이 너는 크냐고 원망도 했었다. 때때로 생각지도 못한 장벽이 나를 힘들게 할 적마다 너와의 만남이 과욕을 부린 게 아닌가 싶어 후회한 적도 있었단다.

둘이서 바람을 맞으며 이런저런 추억을 하나하나 꺼내 보니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강산이 변할 만큼의 긴 세월을 함께 보낸 지금 동반자의 나이도 사람의 나이로 환산하면, 나와 비슷한 나이가 된 것 같다. 앞으로 우리 둘이 같이할 수 있는 날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니 너는 나의 영원한 동반자였다.

나는 다른 동반자를 맞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너와의 흔적이 삶의 한 페이지로 영원히 남지만, 너는 내 곁을 떠나면 부디 부실한 몸을 잘 정비해 젊은 새 주인을 만나렴 하여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길 부탁하며 가노라니 휑한 들녘에 서 있는 가로수 사이로 햇살이 나의 마음을 위로하듯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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