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구리
너구리
  • 전현주 수필가
  • 승인 2024.01.03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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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전현주 수필가
전현주 수필가

 

늦가을 아침에 너구리를 보았다. 너구리는 큰길에서 갈라져 내려가는 1차선 도로 위에 잠자듯 모로 누워 있었다. 워낙 좁은 길인 데다 바로 코앞이 풀숲인 것으로 보아 황급히 길을 건너다가 변을 당한 모양이었다. 거친 털 위에 된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놀란 가슴으로 뒷거울을 보니 뒤따라오던 차도 서둘러 방향을 트는 모습이 보인다.

혼자였을까. 가족들과 함께 길을 건너다가 그리됐을까. 가까스로 차를 피해 조금 늦게라도 무리를 따라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늘 정말 큰일 날 뻔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포근한 둥지에서 곤한 몸을 누일 수 있었다면….

올봄에도 너구리를 보았다. 남편과 함께 비닐하우스에 이른 감자를 심을 때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하우스 네 동에 감자를 심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북향 산그늘에 잔설이 남아있는 2월인데도 하우스 안은 뜨거웠고 움직일 때마다 먼지가 풀풀 일었다. 점점 심해지는 어깨와 허리의 통증으로 나는 말을 잃었다. 자꾸 화가 났다. 그렇다고 남편이 혼자 무던히 애를 쓸 게 뻔한데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취미로 농사를 짓는다더니 나도 몰래 이렇게 크게 일을 벌여 놓았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학원은 저녁에나 수업을 시작하니 운동 삼아 농사를 짓겠다 했을 때 굳이 말릴 필요가 없었다. 차에 실리는 엄청난 씨감자의 양에 놀라긴 했지만 감자는 원래 그렇게 많이 필요한 줄 알았다. 온종일 감자 싹을 자르면서도 좋게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 하우스 옆 비닐을 훅훅 감아올렸다. 잠시 앉아 땀을 식히던 그때 하우스 밖의 마른 풀 사이로 천천히 움직이는 생명체가 보였다. 길고양이려니 했지만, 자세히 보니 너구리였다. 비쩍 마른 너구리는 힘겹게 발을 떼고 있었다. 다친 것인지 굶주린 것인지 털은 듬성듬성 빠져있고 얼굴도 꾀죄죄했다. 가까이에 사람이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만 보고 나아가고 있었다. 삶이 고달파 보였다. 마치 흙투성이가 된 우리의 모습 같았다. 낯선 짐승 냄새를 맡았는지 갑자기 마을의 개들이 짖기 시작했다. 너구리는 이내 사라져 다시 볼 수는 없었지만, 그 후로 비닐하우스에서 일할 때마다 습관처럼 멍하니 흔들리는 풀잎을 바라보곤 했다.

우리는 어두운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편을 곁에서 바라보며 나는 수시로 가슴을 졸였다. 남편은 어쩌면 감자를 캐고 배추를 나르면서 잠시 어깨 위의 무게를 잊고 싶었는지 모른다. 노력한 만큼 수확한다는 말을 정답이라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배추 농사는 두 번이나 실패했지만 비싼 경험을 했으니 그것도 일종의 수확이라며 검게 그을린 남편이 환하게 웃는다. 1년 동안 나와 아이들을 그렇게 힘들게 해 놓고도 저리 웃는다.

끔찍하게 힘들었던 기억에 나는 지금도 기가 막히지만, 돌이켜보면 순간순간 감사한 나날이었다. 가격이 급락해 팔 수 없게 된 배추를 온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고, 처음이라 불량이 많았던 인큐베이터 애호박도 저녁마다 이웃들에게 배달했다. 못생긴 감자도, 고구마도 나누어 먹을 사람이 있으니 다행이었다. 반가워하고 고마워하면서 힘이 들까 걱정해 주는 이웃들이 있어서 위로받았다.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그렇게 우리의 힘든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는 게 무엇보다도 고마웠다. 그러고 보니 농사가 끝나자마자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내년 농사 계획을 짜고 있는 나도 조금 우습기는 하다.

아침마다 지나는 길 위에 아직도 너구리가 누워 있다. 그곳이 가까워질수록 자그마한 몸이 부서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아득해진다. 힘겹고 불안한 삶을 마무리하지 못한 것 같아서 가엽다. 며칠 새 더 야위어진 너구리를 조심히 비켜 내려와 차를 세우고 준비해 온 장갑을 꺼냈다. 양지바른 풀밭 위에 놓아주며 부디 편안히 쉴 수 있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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