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과 촌뜨기
문화인과 촌뜨기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4.01.02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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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아침에 달걀찜을 했다. 어머니도 마침 드시고 싶었는지 달게 잡숫는다. 다행이다. 어머니를 모시며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입에 맞게 음식을 해드리는 일이다. 틀니를 쓴 지 오래되어 질기거나 딱딱한 건 못 씹고 차가운 음식도 잘 못 드신다. 또 어쩌다 조금 매운 거라도 드셨다가는 단박에 사레가 들려 기침이 나오곤 한다. 항상 잘 먹었다, 다 맛있다고 하시지만 내 생각엔 입맛 나는 것도 한두 번이다. 메뉴와 조리법이 다양해야 하는데 가뜩이나 솜씨가 없는 나로서는 매 식사 챙겨드리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래도 어머니와 딱 맞는 취향이 하나 있다. 바로 모닝커피다. 나는 아침에는 식사 대신 커피를 한잔 내려 마시는 습관이 있다. 어머니 오시고 첫날도 아침상을 차려드리고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렸다. 커피 향이 좋았던지 어머니도 한잔 달라고 하셨다. 우리 집엔 믹스커피가 없는데요? 했더니 그냥 그것도 좋다, 많이 말고 입가심하게 한 모금만 주면 된다셨다. 때마침 다도 모임에서 쓰던 작은 찻잔이 있어서 거기에 한잔 따라 드렸더니 마시며 참 좋아하셨다. 그 뒤론 아침엔 으레 식후 커피 마시는 게 기본이 되었다.

오늘도 커피를 내려 작은 잔과 머그잔에 담는다. 사과도 한 개 깎아 식탁에 앉는데 어머니가 웬일로 남편도 한잔 갖다 주라고 하셨다. 밥 먹고 커피 한 모금 마시면 소화도 잘되고 몸에도 좋다면서. 남편은 손사래를 쳐가며 난 이거면 됐다고 하고는 얼른 사과를 한쪽 집는다.

“우리는 문화인이고 너는 촌뜨기야!“

어머니 한마디에 우리는 빵 터져서 한바탕 웃었다. 그러곤 문화인끼리 마시자며 커피잔 건배를 제의하는 어머니, 그 눈빛이 개구쟁이처럼 천진난만하다. 새삼 깨닫는다. 그래, 어머니는 원래 이렇게 흥 많고 유쾌한 분이셨지.

웃음 끝에 남편이 이걸로 글 한 편 쓰면 어떻겠냐 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 글쟁이와 살다 보니 시나브로 글감 알아보는 눈이라도 생긴 건가? 문화인과 촌뜨기, 속으로 나도 쌈박한 글 제목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어머니 말대로 남편은 촌뜨기다. 촌뜨기 중에서도 상(上)에 속하는 촌뜨기일 것이다. 커피는 물론 안 보던 음식은 입에 댈 생각조차 안 하고, 늘 먹던 것만 찾는다. 큰맘 먹고 솜씨를 발휘해 유명 쉐프의 레시피로 요리를 차려냈다가 아예 젓가락도 안 대 속상했던 적도 부지기수다. 내 음식 솜씨가 형편없어진 건 모두 이런 남편 탓인 거다.

음식뿐만 아니라, 업무에 꼭 필요한 전자메일 보내기나 간단한 서류작성 같은 것도 배울 생각을 안 한다. 근처에서 배달 음식을 주문하는데도 멀리 사는 아들에게 부탁할 정도면 말 다 한 거지. 차근차근 설명하면서 하나씩 직접 해 보게도 하고 때론 충격요법으로 구박을 줘 봐도 통 진전이 없다. 어느 순간부터는 요리처럼 점점 시도 자체를 안 하게 되고 차라리 후딱 대신해주고 만다.

하지만 요즘 같아선 남편이 이렇게 촌뜨기여도 상관이 없다. 어머니 모시고부터 남편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물론 스스로 작심한 부분이었겠지만 기대했던 그 이상이다. 내가 없을 땐 어머니 식사를 챙겨드리고, 발톱도 깎아드리고, 무료하지 않게 퍼즐도 같이 맞추고, 저녁 먹은 후 한 시간 정도는 좋아하시는 화투도 치면서 살뜰하게 보살펴 드린다. 커피 한잔 못 마시면 어떻고 음식 주문 좀 못하는 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우리 집엔 문화인 둘에 촌뜨기 하나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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