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진년 첫날 아침
갑진년 첫날 아침
  • 심억수 시인
  • 승인 2024.01.02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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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엿보기
심억수 시인
심억수 시인

 

청룡이 힘차게 하늘로 오르는 새해 첫날 아침 창밖을 본다. 한여름 등을 내어 주었던 크고 작은 나무들이 모두 옷을 벗었다. 벌거숭이 나목이 온몸으로 찬바람을 안는다. 침묵하던 나목이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려는 듯 윙~ 생명의 소리를 낸다. 헤아릴 수 없이 떨어져 나간 나뭇잎처럼 떠밀려 보낸 70년이 밀물이 된다.

연습 없이 달려온 70년 인생이다. 겨울 나목처럼 시간을 떠내 보내고 떠나 온 것도 아닌데 어느새 찬란한 젊음이 떠나갔다. 60 고개 퇴직과 함께 나의 삶의 1막은 끝이 났다. 마음은 청춘인데 기력은 느슨해지고 싱그러웠던 피부가 팍팍해졌다. 우주 만물은 변한다는 이치를 잊으며 살아가기에 풍선에 바람 빠지듯 떠나간 젊음이 안타깝다.

70년을 살아오면서 반복되는 일상의 날을 시간에 떠밀려 정신없이 보냈다.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핑계로 앞만 보고 열심히 뛰었다. 그러나 열심히 뛰었던 일상의 날들이 그렇게 녹록하지는 않았다. 주말과 휴일에 가족과 함께 보내려고 노력도 해보았다. 애·경사와 각종 모임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 한때도 있었다. 그래도 인내하고 용기를 주는 가족들의 정감 어린 배려가 있어 위안이 되었다. 말없이 나를 믿고 응원해준 가족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함께 늙어 감에 스스로 위로하며 나목을 본다. 찬란한 새봄을 위해 잎을 버린 모습이 당당하다. 새날을 채워 가는 겨울나무의 빈 가지에 바람이 가득하다. 가슴에 안았던 소망을 앗아간 바람마저 기다림으로 걸어 두고 여백의 미를 안으로 다스리고 있다. 버림으로써 초연해지는 나목처럼 땅속의 별이 되고 싶은 인생 당당한 알몸 되기 위해 나는 무엇을 버려야 하나. 채워서 비워지는 게 아니라 비워지는 걸 다시 채우려는 나의 욕심을 거두고 나면 내 생의 뒤안길에 시간만 둘 수 있을까. 모두를 버리고서야 모든 걸 얻은 듯 마냥 자유로운 나목을 닮으려 애써 보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비워야 채운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비워야 한다는 말은 잘하면서 비우지 못하고 살았다. 인생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당치 않은 목표를 세워 놓고 내 딴에는 열심히 사는 것이라고 이 욕심 저 욕심 너무 많이 부렸다. 아집과 욕심에 사로잡혀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아 혼자만의 생각에 괴로워했다. 나를 방어한다는 알량한 아집의 빗장을 걸고 나만의 욕심을 채우고 있었다. 돌이켜보니 나의 삶이 아닌 남을 의식한 삶을 살았다.

지금까지 나는 신이 준 삶의 궤적대로 살았다. 이제는 삶의 틀에서 벗어나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틀에 박힌 직장에 가지 않아도 된다. 늦잠을 자도 된다. 어디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곳이 많다. 하고 싶은 것도 많다.

70년 세월 이제 부질없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쪼그려 앉아 눈높이 낮추고 다시 삶의 2막을 시작한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둘 보인다. 너무 높이 보아서 보지 못했던 고개 숙인 사람을 본다. 너무 멀리 보아서 보이지 않던 나의 그림자도 본다.

내 삶의 종착역을 향해 가는 인생 2막 길은 욕심도 버리고 마음을 내려놓으며 가야겠다. 남을 의식하는 삶이 아닌 나의 삶을 위해 좀 더 나에게 헐렁해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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