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그믐 밤에
섣달 그믐 밤에
  •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4.01.01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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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사람이 만든 간격 중에 제일 큰 것이 섣달 그믐과 정월 초하루일 것이다.

하루가 한 해인 셈이다.

그만큼 세월의 빠르기를 체감하기도 하는 것이다.

당(唐)의 시인 고적(高適)은 낯선 타향에서 새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믐날 밤에(除夜作)

旅館寒燈獨不眠(여관한등독불면) 여관의 싸늘한 등불 아래 홀로 잠 못 이뤄
客心何事轉凄然(객심하사전처연) 무슨 일로 나그네 마음은 점점 더 슬퍼져 가는 걸까?
故鄕今夜思千里(고향금야사천리) 고향에서는 오늘 밤 천 리 타향 이 사람을 걱정하겠지만
霜鬢明朝又一年(상빈명조우일년) 내일 아침이면 백발의 늙은 몸에 또 한 살이 더해진다네

한 해가 마감을 하는 섣달 그믐의 밤은 가족 친구와 떨어져 타향을 떠도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쓸쓸한 시간일 것이다.

시인은 타지의 객사에서 한 해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니 그 쓸쓸함이야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을 것이다.

여관방을 밝히는 차가운 등불만이 시인의 유일한 벗이었다.

차가운 잠자리에 쓸쓸하기까지 하니 잠이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잠 못 드는 나그네 마음이 갈수록 슬퍼지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한 해의 마지막 밤이라는 시간의 특수성도 그 몫을 톡톡히 했을 것이다.

마지막 밤이다 보니 천 리나 떨어진 고향 생각이 더욱 절실해졌고, 잠깐 잠들었다 눈 뜨면 그렇지 않아도 늙은 몸에 또 한 살이 더해질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며 뇌리를 스쳐, 시인은 잠들 수 없었던 것이다.

냉정하게 보면 세밑이니 새해니 하는 말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설정해 놓은 개념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 설정한 개념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곤 한다. 그래서 세밑이 되면 부쩍 고향이나 가족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리라.

그리고 세월의 빠르기를 가장 극적으로 느끼는 시기도 이때다. 섣달 그믐 밤에는 불과 몇 시간이 한 해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쓸쓸함이 밀려오고 늙음에 대한 자각이 뚜렷한 세밑이나 정초에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비법 하나쯤은 갖추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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