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즐기는 민들레
겨울을 즐기는 민들레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 승인 2023.12.2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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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연휴 둘째 날, 한파가 잠시 물러가고 평년기온을 찾았다. 양지의 눈은 내린 시간을 잊고, 음지의 눈은 버드나무 꽃씨가 쌓인 정도로 덮고 있다. 눈이 녹은 텃밭의 색은 칙칙한 무채색이다. 누런 잔디가 보이기는 하지만 짙은 갈색의 흙이 대부분이고, 나뭇가지도 모든 것을 덜어내고 침묵의 시간이다.

갈변한 낙엽 사이로 초록이 보인다. 온전한 형태가 아닌 듯하지만 초록이다. 지칭게 나물, 뽀리뱅이, 곰보배추가 겨울의 초록을 잃지 않고 있다. 한여름에 비해 더 짙고 강하게 자라고 있는 듯하다. 그중 겨울에 흔하지 않은 초록이 자리 잡고 있다. 한겨울 지난 이른 봄도 아니고, 이제 겨울의 한가운데로 드는 시기에, 생경하다.

제우스가 인간 세계에 내려보낸 최초의 여자, 여신을 닮은 아름다운 외모에 올림포스 12신으로부터 능력을 부여받은 여자, 선물이자 저주인 호기심 때문에 `희망'을 남겨놓고 만악의 근원을 퍼트린 여자, 판도라(Pan_모든, dora_선물 / 모든 선물을 받은 여자). 공예가이자 대장장이가 빚어낸 여자는 열지 말라는 경고를 어기고 판도라 상자(Pandora's box)의 뚜껑을 열었다. 판도라의 상자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처음 제우스가 결혼선물로 준 것은 `피토스 Pithos' 손잡이가 달린 토기로 만들어진 항아리다. 작가는 이 `피토스'의 이야기를 담아 작품을 만들었다. 3천 8백여개의 조각을 마이크로 용접으로 이어 만든 작품이다. 피토스를 이루고 있는 개체는 민들레 씨앗이다. 왜 많고 많은 꽃씨 중에 민들레 씨앗이었을까?

민들레가 뿌리를 내리는 곳은 정해져 있지 않다. 고운 흙이든 깨진 시멘트 바닥이든 간에 가리지 않는다. 씨앗이 닿은 곳에 뿌리를 내린다. 줄기는 보이지 않는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자란다. 바퀴에, 발길에 치이고 짓밟힌다. 그러나 생명엔 지장이 없다. 지상에 나와 있는 길이의 60여 배의 긴 뿌리를 가지고 있다. 절대 죽지 않는다. 뿌리를 깨 내어 자르거나 며칠을 말려도 끊긴 마디에서 뿌리를 내린다. 난도질해도 가느다란 뿌리를 내리는 굳건함을 가지고 있다. 씨앗은 전 세계를 누빈다. 바람을 타고, 손길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날아간다. 가시밭도 마다치 않는다. 순리를 따르고 스스로 번식하고 기운차게 일어나 번성한다. 꽃대는 잎의 수만큼 올린다. 그 순서는 전에 핀 꽃이 진 다음 올린다. 서두르지 않는다. 순서를 기다린다. 그렇다고 쓸데없는 잡초가 아니다. 이른 봄 잎이나 뿌리는 그 어떤 나물보다 맛나고 몸에 좋은 먹거리가 된다. 종기 등 상처를 낫게 하는 치료제로 요긴하게 쓰인다. 로 약용으로 요긴하게 쓰인다. 유용한 쓰임새가 있다. 한겨울을 이기고 들판에 가장 먼저 봄을 알린다. 부지런한 벌과 나비에게 한없이 꿀을 제공한다.

한겨울, 집 주변이 온통 풀밭이다. 기후변화가 아니더라도 겨울에 오히려 왕성하게 자라는 잡초가 있다. 잡초라고 마냥 쓸데없는 것은 아니다. 생으로 먹거나 무쳐 먹을 수 있는 겨울 잡초들이 많다. 구태여 심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푸성귀다. 그렇다고 구태여 먹진 않는다. 마냥 넋 놓고 바라만 봐도 좋은데 굳이 뽑을 일이 없다.

올해는 새로운 푸성귀가 텃밭 한자리를 차지했다. 눈이 덮인 자리에 민들레 잎의 모양으로 눈이 녹았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화살표다, 여기저기, 이왕이면 흰 민들레였으면 싶지만, 흰 민들레가 아니어도 좋다. 뽑지 않는다면 여기저기 자리를 잡을 것이고, 좀 더 게으른 농부가 된다면 천지가 민들레가 될 것이다. 워낙 넓은 영역으로 뻗고 움직이다 보니 어쩌면 몇 포기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포기의 민들레라도 잎의 수만큼 꽃대를 올릴 것이니, 수천 수백개의 꽃씨를 번갈아 가며 흩날릴 것이다. 무수한 발길에 짓밟히면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는, 희망의 불사신, 민들레가 겨울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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