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고 가라하시네
업고 가라하시네
  • 백범준 작명철학원 해우소 원장
  • 승인 2023.12.20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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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백범준 작명철학원 해우소 원장
백범준 작명철학원 해우소 원장

 

지나간 그 겨울을 우두커니라고 불렀다 / 견뎠던 그 모든 것을 멍하니라고 불렀다 / 떠나가는 길 저쪽을 물끄러미라고 불렀다 / 나무에 피어나는 꽃을 문득이라 불렀다 / 그 곁을 지나가는 바람을 정처 없이라 불렀다 / 내가 이 세상에 왔음을 와락이라고 불렀다

권대웅 시인의 시 `삶을 문득이라 불렀다'의 일부다. 필자의 최애(最愛) 시(詩)다.

문득 부여 된 꽃 같은 삶. 원하여 피운 꽃은 아니나 초라히 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쉽지 않았다.

시간은 흘렀고 그것도 정처 없이 흘러 이곳에 데려다 놓았다. 계절은 어느 속담처럼 여름에는 무엇을 했느냐 물을지도 모르는 겨울이다.

혹여나 묻는다면 우두커니 때때로 물끄러미 어쩌면 멍하니 견뎌냈다 말하리라. 더 솔직히는 버텼다 말하리라. 삶은 끝없는 버팀이다. 버텨야 한다. 힘들게 악착같이 부어 온 몇 푼의 연금이라도 받아먹으려면 버텨야 하고 아직 못 본 손주 얼굴 보고 한번 안아는 보려면 버텨야 한다.

인간은 망각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기억하는 존재이다. 나이 들면 추억 먹고 산다지만 고통도 슬픔도 후회도 미련도 망각에서 보다는 기억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애써 지운 기억이 되살아나 치유되어 가던 상처를 건드려 덧낸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상처는 다만 상처이고 인생은 인생이다. 삶이 우울하다면 현재를 살지 않고 과거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티는 힘은 기억력이 아닌 이른바 망각력에서 나온다. 망각은 신이 주신 위대한 축복이자 은혜이다. 영영 녹지 않을 서리가 머리에 내려앉은 이 나이에 영양제로는 회복 될 리 없는 노안과 서서히 떨어지는 청각은 노화의 산물이 아닌 더 멀리서 보고 더 귀 기울여 들으라는 신의 가르침이자 선물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렇게라도 생각해야 버틸 수 있음을 이제는 안다.

불교에서는 중생들이 사는 곳인 즉 우리가 사는 세계를 사바세계(娑婆世界)라 부른다. 여기서 사바(娑婆)는 산스크리트 Saha를 음역한 것으로 `참고 견뎌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불교에서의 인간세상은 고통과 번뇌가 가득하여 그것을 참고 견뎌내야만 하는 세상이다. 불교에서 인연법(因緣法)에 따른 업보(業報)라는 개념은 때때로 협박이었고 그래서 희망이었다. 그래도 이정도 무게의 업(業)이라면 다시 일어설만했고 다시 걸을만했고 그래서 업고 갈만하다 여겼다. 업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 또한 있다는 것을 알고는 환희의 눈물도 흘렸다. 업장소멸(業障消滅). 33관음성지 순례길. 그렇게 시작 된 길이었다.

첫걸음은 2년 전 꽃 피우고 꽃 떨구던 봄날 충남 공주 마곡사(麻谷寺)였다. 33관음성지는 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어 관(觀)하시면서 어려움으로 고통 받는 중생의 기도와 소원을 들어 구원하신다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로운 원력이 살아 숨 쉬는 한국의 대표적인 33곳의 사찰이다. 이곳을 모두 다녀오는 것을 33관음성지순례라 한다. 며칠 전 다녀 온 대한불교 총본산 조계사(曺溪寺)가 필자의 순례길 마지막 방문지였다.

내 평생 여행 삼아라도 오려고 했을까 하는 땅 끝에도 이곳에도 있을까 싶은 첩첩산중에도 절집은 있었다. 절맛은 깊었고 그만큼 길은 박했다. 충분히 절다운 곳에서 절답게 자리하고 있었다.

업장(業障)이라는 업장은 다 싸 짊어지고 가서 내려놓고는 꽃 짊어지고 내려온 나날들이었다. 풍경소리에는 귀 씻고 향에는 몸 씻은 나날들이었다. 그 값 치루기에 턱없는 푼돈 불전함에 고이 넣고 조아렸으나 이 또한 새로운 업(業)은 아닐 런지.

전생의 기억 업(業)인지 보(報)인지 기억해내지 못하나 문득 그것도 와락 스치는 생각 하나 있으니 내 전생의 업장이 결코 얇지는 않은가 보다. 이번 생 엎지도 못하니 업고 가야겠다. 성불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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