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대와 빨치산
빈대와 빨치산
  • 장민정 시인
  • 승인 2023.12.18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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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장민정 시인
장민정 시인

 

세상에, 빈대가? 빈대가 다시 출현했다고?

나는 온몸이 옥죄어지는 반응으로 몸을 떤다.

빈대 그놈들, 그 진절머리나는 놈들, 옛날에 몰살되어 우주 밖으로 내던져진 줄 알았는데 그놈들이 아직도 지구에 살아 있다니, 살아서 런던이랑 파리 등등 인류의 자존심을 뭉개고 있다니. 빈대 그놈들이 무소불위의 천국을 건설했던 그때를 이제라도 고발해야 할 것 같다.

요즘 사람들 바퀴벌레는 알아도 빈대는 모를까? 아니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속담은 대부분 알고 있을 터. 빈대, 내게도 까마득히 잊힌 이름인데 그 징그러운 놈들이 다시 출현했다니….

나는 6, 25 전쟁 무렵 8살 어린애였다.

실제 교전이 형성되지 않은 후방에 살아서 내게 남아있는 전쟁의 기억이란 것을 생각해 보니 빨치산과 빈대로 점철되어 있다.

오랜 후에야 퍼즐이 맞추어진 일이지만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바뀌고 경남 경찰이 위로 위로 진격할 무렵, 그러니까 그해 10월쯤일 것이다.

한동안 낮에는 경남 경찰이, 밤에는 빨치산의 세상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동네에서 그래도 큰 집이던 우리 집은 그들의 타깃이 되어 밤마다 시달려야 했다. 밤이면 떼로 몰려와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총부리를 겨누던 빨치산의 모습은 공포였다.

어린 것들이 덮고 자던 이불까지 걷어가던 빨치산, 집안의 남자들은 모두 피난을 떠난 후라 할머니와 어머니는 먹을 것이나 싱가재봉틀 같은 것을 필사적으로 숨기면서 오빠와 나를 이웃의 허름하고 비좁은 이웃집으로 피해 잠을 자게 하곤 했다. 살아야 한다고, 어떻든지 살아내야 한다고.

지금도 그때 생각이 미치면 나는 진저리치며 몸을 떨곤 한다. 밤은 빨치산의 세상만이 아니었다. 빈대의 세상이기도 했다.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나는 격으로 빨치산을 피해 찾아든 단칸방에서 나는 너무 괴로웠다. 그 집 식구들 사이에 끼어 하룻밤 보내기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쪽잠이든 칼잠이든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눕기 무섭게 까맣게 달려들어 물어뜯고 피를 빨아대는 빈대들, 괴로워서 일어나 호롱불이라도 켜면 벽을 타고 까맣게 줄행랑치는 빈대들.

이를 물고 집게손가락으로 바쁘게 하나씩 눌러 죽이는 진풍경이 하룻밤에도 여러 번씩 벌어지곤 했다.

불빛을 보고 빨치산이 쳐들어온다고 마음대로 불도 켜지 못하는 밤, 어두운 밤은 빈대들의 세상이었다. 온몸을 고스란히 빈대에게 내어주는 밤들이었다.

고단한지, 익숙해선지 빈대에 물어뜯기면서도 정신 모르고 잠든 이웃집 식구들 틈바구니에서 어린것이 혼자 잠들지 못하고 훌쩍이던 지옥 같은 밤은 아무래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그 시절, 그때 그 시절엔 집집마다 빈대의 핏자국이 벽지 무늬처럼 빼곡하고 예사로웠다.

빈대, 끔찍한 세월 속 진저리쳐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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