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방
비밀의 방
  • 임현택 전 괴산문인협회장
  • 승인 2023.12.13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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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전 괴산문인협회장
임현택 전 괴산문인협회장

 

아쉬운 이별을 했다. 하세월동안 동고동락 했음에도 떠나보내야 했다. 허연 머리카락처럼 모서리가 희끗희끗해지고 반듯하게 각 졌던 모양은 허리 구부러진 노구처럼 본연의 자세도 잃어버린 체 주저앉았다. 가죽은 오래되어 태닝 되어야 제 맛이라지만 노구처럼 구부러진 몸을 제아무리 일으켜 세워도 또 주저앉아 수년간 보물들을 꼭꼭 간직했던 비밀의 방과 이별을 통보했다. 뒤적뒤적 비밀의 방인 낡은 가방을 염탐하듯 들추다 낡은 노트에 손길이 멈췄다. 그 속에 빛바랜 메모장에 깨알같이 적힌 전화번호가 소곡이 들어 있었다. 요즘은 명함 건네기보다 그 자리에서 전화번호를 입력하거나 인스타그램으로 소통하는 IT 시대에 묵은 메모지는 잃어버린 물건을 찾은 것처럼 화색이 돈다.

가죽 냄새가 솔솔 풍기는 새 가방으로 이사한 물건들은 낯설 법도 한데 벌써 제자리인 냥 스스럼없이 자리를 꿰차고 앉아 다시 비밀의 방을 꾸미고 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주어야 하거늘 제 몸 가누기조차 힘겨운 듯 푹 쓰러져 있는 낡은 가방은 추수가 끝난 텅 빈 가을 들녘처럼 허허롭기만 하다. 그동안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동고동락하면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는데 무엇을 잃은 것 같이 서운한 느낌이 휘감는다.

비밀의 방에서 나온 빛바랜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저장을 하자 금방 부자가 된 듯 마음이 풍요롭다. 수없이 저장된 번호를 하나하나 터치하다 찰나 손길이 멈춘 전화번호 하나, 통화버튼을 누를까 말까 망설이다 방해될까 싶어 휴대폰을 덮었다. 한결같이 좋은 글과 영상메시지를 전달하는 그녀, 맘 편히 디디고 다닐 수 있도록 온몸을 내주는 섬돌 같은 그녀는 독서광이다. 핸드백 속에는 늘 책이 들어 있고 틈틈이 독서를 하면서 메모하는 그녀를 두고 서치(書癡)라 했다.

책벌레 그녀는 전자출판물이 대세인 세상. 단말기만 있으면 언제나, 어디서나 전자책을 볼 수 있어 모두 다 전자기기를 이용하여 전자책을 보는 세상이지만 그녀는 늘 종이책을 선호한다. IT 강대국인 우리나라는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의 발전으로 사람들은 더 빠르고 편리하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손안의 네트워크인 스마트폰은 세상을 넘나드는 현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일까 대부분 사람은 스마트폰에 점령당한 듯 빠져 있다. 일상생활에 스마트폰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시시때때로 확인을 하고 심지어는 고개를 떨군 채 터치하기에 바쁘다. 하여 이를 두고`수그리족'이라 하지 않던가. 그렇게 수그리족들은 전자책 독서보다는 대부분 인스타그램 하기에 열정을 쏟고 있다.

영국사람들은 카페나 공원 그리고 기차 안에서도 책을 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 가방에는 늘 책이 들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산책하듯 즐겁게 책과 친해져 있다.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원대한 꿈과 이상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했다. 누구나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한다. 그럼에도 그 계획을 정말 실천했는지 아니면 계획만 세우고 말았는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독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허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하철이나 공원은 물론 심지어 식사를 하면서도 스마트폰에 빠진 수그리족들이 곳곳에 눈에 띄는 걸 보면 영국사람들과는 뭔가 모를 언발란스다.

이 겨울 손끝으로 터치하여 전자기기를 넘기기보다는 손끝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는 책벌레. 그녀의 아름다운 아날로그 모습은 늘 긴 여운을 준다. 그날 저녁 가죽 냄새 솔솔 풍기는 내 비밀의 방엔 빛바랜 메모장과 산문집 한 권이 일가를 이뤘다. 계획을 세우기보다 실천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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