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에 관하여
물건에 관하여
  •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 승인 2023.11.2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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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현장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까다롭다는 말을 별로 들어보지 않았다. 그런데 가끔 까다롭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건 물건과 관련해서 그렇다. 몇 년 전 학과장을 할 때 학과 교수들이 다 같이 모여 식사하는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식사할 탁자를 준비하고 그릇과 꽃을 배열하는 등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때 도와주던 선생님께서 “생각보다 까다로우신걸요”했다. 일회용 그릇이지만 그릇은 이 브랜드로, 탁자를 덮는 커버도 한번 쓸 것이지만 저 브랜드로, 와인 잔은 여기 것으로 등등 가격과 관계없이 마음에 꼭 맞는 물건을 기억했다가 그것으로 해야 편안한 마음이 드니 어쩔 수가 없다. 물건은 물건일 뿐인데 말이다.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좋은 글을 쓰라는 소망을 담아 가족들이 펜을 선물했다. 열어보고 참 좋았다. 만년필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가족들이 어떻게 수소문했는지 몽블랑의 `마이스터슈튀크' 만년필을 구해 주었다. 요즘도 학위논문 심사자에 이름을 적는 것과 같이 중요한 서명을 할 때 가능한 그 만년필을 쓴다. 몽블랑은 생각보다 펜촉이 많이 부드럽다. 아마도 알파벳의 필기체는 날아가듯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져 있으니 부드러운 촉감으로 종이에 닿아야 좋을 것이다. 몽블랑 만년필이나 볼펜은 문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애장품처럼 여겨지며 소장각을 부르는 펜 중 하나다.

`심미안 수업'의 저자 윤광준에 따르면 몽블랑은 1906년 독일 함부르크의 작은 만년필 공장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중요한 펜촉은 숙련된 장인들이 150여 개의 공정을 거쳐 일일이 손으로 만든다. 만년필 한 자루를 완성하는데 6주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정말 천천히 수작업으로 생산하는 것이다. 만년필의 몸체는 깊은 광택이 나는데 이 광택은 애초부터 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연마하여 만든 정성의 산물이라 하니 작은 펜에 담긴 성의가 참 귀하게 느껴진다. 특히 이 만년필 공장에는 모든 직원이 천천히 그리고 여유 있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중시한다. 작업장 내에는 음악이 흐르고 어느 누구도 일정을 독촉하지 않는다. 혹시 급히 일하다가 결점을 놓치게 될까 염려한 것이다. 천천히 스스로 자신의 공정을 돌아보며 결점과 오류를 찾게 하려는 의도다. 윤광준은 `효율을 포기해야만 다다를 수 있는 경지'라고 그 공정을 평했다.

바느질을 할 때는 또 어떤가? 요즘은 어깨와 눈 때문에 쉬고 있지만 한 때 퀼트 덕분에 참 행복했었다. 바느질이야 실과 바늘만 있으면 되겠다 싶겠지만, 재단을 하는 초크, 자, 가위를 비롯하여 시침핀, 실을 바늘에 꿰는 기구, 바늘땀을 뜯어내는 기구, 쪽가위, 바늘이나 시침핀을 얹어 두는 자석접시, 아플리케를 할 때 쓸 작은 다리미 등등 여간 자질구레한 것이 아니다.

바늘도 호수에 따라 다양하게 구색을 갖추어야 옷감의 두께에 따라 적합하게 선택하여 쓸 수 있다. 이 자질구레한 것들은 크기부터가 작다. 그런데도 그 작은 것들을 얼마나 세심하고 정교하게 만드는지 클로바 바늘과 도구들은 언제나 정답이었다. 아마도 클로바 공장에도 몽블랑처럼 많이 만드는 것보다 최고의 것을 만드는 것을 더 중시하는 문화가 있을 것이다.

바느질이나 손으로 쓰는 글씨는 인공지능이 펼치는 세상에서 설 자리가 없어질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몽블랑과 클로바는 인간 중심의 그런 문화가 여전히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듯하다. 종이와 만년필이 여전히 사랑받고 천을 잘라서 다시 이어붙이는 그 미련한 바느질로 밤을 지새우는 사람이 있을 테니 말이다.

TMI지만, 우리말로 편지를 쓰거나 연하장을 적을 때는 몽블랑보다는 덜 부드러운 질감의 만년필을 쓰는 것이 좋다. 한글은 알파벳보다 꺾임이 많아서 그렇다. 어느 브랜드가 적합한지는 한 번 찾아보자. 딱 맞는 그 물건을 찾았을 때, 그것이 사실 큰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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