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나는 나무
소리 나는 나무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 승인 2023.11.28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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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잠결에 알 수 없는 소리가 연신 귓전을 두드린다.

얇은 철판 위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다.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간인데 주변 원룸의 창은 불빛을 훤하게 밝히고 있다. 빗방울 소리는 나지 않는다. 멍하니 창밖을 응시한다. 아스팔트 바닥과 잎을 모두 떨군 나뭇가지가 짙다. 가로등 아래 풍경이 스산해도 너무 스산하다. 비가 오나 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비가 오는 날엔 좀 더 일찍 아궁이게 불을 지폈다. 잠결에 문지방을 넘고 툇마루를 지나, 삐걱거리는 부엌문을 열고 부엌 한쪽 나뭇간의 땔감을 끄집어낸다. 솔잎을 한 움큼 집어 불쏘시개로 쓰고, 콩대며 깻대를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누렇게 마른 솔잎에 성냥불이 닿자마자 불길이 살고 콩대가 들어가며 `타다닥 탁탁' 소리를 낸다. 덜 빠진 콩이 아궁이 앞에 모여진다. 쥐눈이콩도 있고 서리태도 있다. 땔감을 넣으면서 부지깽이로 타들어 가는 콩대를 헤집으며 콩을 가려낸다.

가끔은 불에 들어간 콩깍지가 타고 콩이 익으면서 `탁탁' 소리를 낸다. 아궁이 밖으로 튀밥이 아니라 총알탄이다.

쪼개진 깻대 사이로 `피익', `픽' 아주 짧은소리다. 잘 말라 불이 붙자마자 금세 사그라들었다. 사그라드는 깻대를 부지깽이로 헤집고 연신 콩대를 들이댄다. 오래 사용해 잘 마른 부지깽인데 불이 붙을 새가 없다.

가마솥이 걸려있는 아궁이 옆, 허드렛물을 데우는 아궁이에는 굵은 나무를 넣는다. 굵어 봤자 손목 굵기도 안 되지만, 불땀이 좋은 나무다. 지난겨울 구한 바짝 마른 고주박이를 넣고, 사용을 다한 고춧대를 넣고, 간간이 덜 마른 대추나무도 넣는다. 잘린 마디에서 `치직치직' 소리를 내며, 수분이 빠져나온다. 이내 불길이 세지고 `치~이 익' 세찬 증기를 품는다. 밥 짓는 가마솥안에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품어내는 증기와 화음을 낸다. 세찬 소리를 내는 증기는 솥귀에 부딪히고 이내 부엌 천장으로 부서진다. 부엌 천장은 수증기로 들어찬다. 부엌은 나무 타는 냄새에서 구수한 밥물 냄새로 가득하다. 누룽지가 잘 만들어지는 듯하다. 갈색으로 적당한 색일 것이다.

아카시아 고주박이는 `타닥타닥, 탁탁' 소리를 내며 불이 타던 조각을 튕겨낸다. 이런! 옷에 닿으면 구멍이 나는데. 뿌리 부분이어서 그런지 오래 타면서 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불땀이 좋다. 입은 다물고 타오르는 불길에 `불멍'이다. 눈시울은 마르고 초점을 잃는다.

땔감 구하기가 어려웠던 상황에 고주박이를 캐어 바소고리에 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험난했다. 평상시에는 넓게 다닌 듯한데, 몸집보다 큰 지게를 지고 고샅길을 빠져나가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앞으로 걷기가 힘들어, 지겟대는 양팔에 끼고 몸을 비튼 묘한 자세가 되었다. 그래도 나무를 켜켜이 쌓아가며 바깥 나뭇간이 채워질 때는 흐뭇했다. 어떠한 추운 겨울이 와도 두렵지 않을 만큼 준비를 끝냈다는 만족감이었다.

불땀이 사그라들고, 시뻘건 불기운만 남았다. 이제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는다. 뭉근한 불에 손바닥을 들이대고 손가락을 최대한 펼친다. 따스하다. 사타구니가 따습다. 몽롱한 상태가 좋다.

방고래를 지난 불기운은 굴뚝으로 연기가 되어 피어오른다. 겨울 보슬비는 내리고, 연기는 보슬비를 거슬러 오른다. 소리는 없다. 내리는 빗소리도 피어오르는 연기 소리가 없다. 마루 밑으로 새어 나오는 매캐한 연기에 잔기침 소리만 가끔 들릴 뿐이다.

아궁이의 세찬 화력이 뭉근해질 즈음 먼 산 너머로 뭉근한 태양이 뜨고 있었다. 아궁이 덮개를 덮고 하루의 시작에 태양을 안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이젠 솔잎 사그라지는 소리도, 나뭇가지 타는 소리도, 장작이 타며 불똥이 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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