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
허기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23.11.23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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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용례 수필가
김용례 수필가

지금은 늦가을이거나 어쩌면 초겨울, 어느 계절이라고 단정 짓지 못한다. 나는 늦가을을 좀 더 잡고 싶은 마음이 크다. 농사 갈무리도 다 했고, 지난 주말에 김장도 담갔다. 마당에 추위에 약한 나무들에게 짚으로 옷을 입혀 주는 일만 하면 크게 할 일이 없을듯하다. 무엇보다도 끙끙거리며 몇 달 동안 무겁게 들고 있던 원고를 겨우겨우 마무리해서 출판사로 넘겼다. 
겨울 준비를 끝낸 요즈음 부쩍 허기를 느낀다. 삼시세끼를 다 찾아 먹고 간식도 간간이 먹는데도 영 포만감을 느낄 수가 없다. 신경 쓰던 일들을 해결하고 나면 시원해야 하는데 이제는 마음이 허전하다. 정신을 온통 쏟고 있던 일을 해결하고 나면 온몸으로 피곤함과 허기가 밀려온다. 지금 허기의 늪에 빠져 있다. 얼마간은 이 늪에서 허우적거릴 것 같다. 이 허기를 채워보려고 장화를 신고 또 마당으로 나간다. 
늦가을까지 꽃을 피웠던 구절초 꽃대를 잘라내고 추위에 약한 베롱나무와 감나무에 짚으로 옷을 입혀주었다. 이 쌀랑한 날씨에도 몇 시간 동동거렸더니 땀이 나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시장기가 돈다. 식욕이 생긴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상쾌해 졌다는 신호 같다. 무엇을 먹을까, 머릿속에서 먹을 것들이 뱅글거린다. 바삭하게 구운 빵 한쪽에 달달한 커피도 맛있을 것 같고, 뜨끈한 국물이 있는 라면에 김장 겉절이를 올려 먹어도 맛있을 것 같다. 시장하다는 것, 허기를 느낀다는 것은 몸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몸의 허기는 음식을 먹으면 되지만 마음의 허기는 쉽게 채울 수가 없다. 
나는 외형적으로 보기엔 크게 잘난 것도 없지만, 많이 부족하지도 않게 살아온 것 같다. 지극히 평범하게 살았다. 아들, 딸 큰 말썽 없이 자라주었고 남편은 평범한 직장인, 그럼에도 늘 불만스러웠다. 뚜렷한 이유 없이 사는 것이 별 재미가 없었다. 가슴이 비어 있는 것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마흔 중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면서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오랜 시간 채워지지 않던 허기가 없어졌다. 밥도 중요하지만 마음을 채우지 못하는 것이 더 큰 시장기를 느끼는 것 같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사는 재미도 느끼는 것 같다. 
삶은 그렇게 녹록하지가 않다.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며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이라도 즐길 수 있으면 즐겨야 한다. 내 인생은 내 것이다. 나는 즐기는 것도 습관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삶은 늘 채우고, 비우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끝없이 채우는 일만 할 수도 없고 비우는 일만 해서는 삶을 영위 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생각해보면 삶이란 게 별거 아니다. 허기를 채우며 살아가는 일이다. 배가 고프면 먹고 마음에 허기가 찾아오면 별거 아니지만 하고 싶었던 일을 찾아서 해보는 거다. 거하게 먹고 거창한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본인이 맛있게 먹고 즐거우면 잘 사는 거지 싶다. 오늘 마당에서 땀을 흘리고 라면을 끓여 김장 겉절이를 올려 맛있게 먹었다. 몸과 마음에 허기를 채웠더니 다시 생기가 난다. 살아가는 일은 꼭 집어 선을 그을 수 없다. 늦가을이거나 어쩌면 초겨울 같은 이 계절이 또 하루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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