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더한, 더해가는 나무
시간을 더한, 더해가는 나무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 승인 2023.11.14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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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된서리가 내리기도 전에 겨울이 와버린 탓에 까치밥 몇 개 남겨두고 감을 따버렸다. 먹거리가 몇 개 안 남다 보니 경쟁이 치열해졌다. 가장 일찍 일어난 참새가 가지 끝에 앉았다. 한숨 고르는 점프다. 그리고 바로 날갯짓이다. 고개를 뒤틀어 꺾어 하늘로 향하고 분주하다. 하필 대봉 밑 부분이 맛나게 익었다. 전체가 익었으면 꼭지 부분부터 먹을 텐데, 애처롭다.

갑자기 극성스러운 직박구리가 참새를 쫓아내고 위아래 안 가리고 감을 쪼아댄다. 몇 번 쪼지도 않았는데, 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다른 직박구리가 날아들더니 서로 다툰다. 그나마 달려있던 감도 잎사귀도 우수수 떨어진다.

감나무 아래 나무들이 날벼락을 받았다. 묵사발이 가지에 묻고, 가지사이에 잎이 수북히 떨어졌다. 묵사발이 된 감은 어찌할 수 없지만 가지 사이에 끼인 나뭇잎은 손을 집어 넣어 빼낸다.

나뭇잎을 빼어내고 걷어내며 겨울눈이 존재를 드러낸다. 감나무보다 먼저 잎을 떨군 나뭇가지마다 겨울눈을 달았다. 영산홍은 꽃눈을 달았다. 보일 듯 말 듯 한 솜털을 달고 가지 끝을 한참 부풀렸다. 가지를 쳐주려 했는데 내년 꽃을 보고 쳐주어야 할 듯하다. 목단도 잎자루를 모두 떨구고 눈을 달았다.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햇가지에 바짝 밀착시켰다. V자 모양의 엽흔 안쪽으로 자색의 립스틱을 잔뜩 바른 눈이다. 목피와 같은 색의 바깥 잎 안에 다소곳하게 움츠리고 있다. 내년엔 새 가지로 자랄 눈이다.

커다란 열매가 버거운 명자나무는 꽃눈을 달았다. 연한 녹색의 보호막으로 감싸인 꽃눈이다. 누가 봐도 흰 꽃을 품은 눈이다. 바람이 소리를 전한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낙엽이 굴러 발아래 모인다. 명자나무의 꽃눈은 물을 한 참 머금고 금방이라도 터트릴 기세다. 메마른 나뭇가지에 물방울이 매달려 있다. 바스락거리는 시간을 한참이나 앞선다. 메마른 낙엽을 움켜 명자나무 주변으로 덮어준다. 명자나무잎, 감나무잎, 화살나무잎이 소복하게 켜켜이 쌓였다. 겨우내 눈이 녹으며 거름으로 거듭날 시간의 흔적이다.

겨울의 시간이 갑자기 찾아들었다. 준비하지 못했기에 서둘러 월동 준비를 한다. 기계의 시간에 익숙해져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 서두른다. 냉해를 입을 만한 것은 실내로 들인다. 안으로 들였다 내놓았다가 하면서 매년 자리가 바뀐다. 나고 드는 상황에 고정 자리가 없다. 바쁜 와중에 겨우내 얼어 터질 것도 손을 본다. 돌절구에 고인 물을 퍼낸다. 돌확의 고인 물에 살얼음이 얼었다. 사각사각 씹힐 듯한 두께다. 고양이나 새가 마시고 목욕하는 곳이라 퍼내지는 못하고, 살얼음을 드러내고 휘저어 준다. 금세 슬러시가 된다.

밖에서 한겨울 한파를 이겨낸, 이겨낼 나무들만 남았다. 늘 있었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변하지 않은 그 자리다. 변한 건 지난해보다 겨울눈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가지가 부쩍 많아졌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아가며 자라는 속도는 배가 되었다. 그러니 줄기는 당연 더 굵어졌다. 젓가락 굵기의 1년생 묘목이 시간을 거듭하며 성목이 되었다. 늘 보잘것없는 줄기에서 자연의 시간을 같이 했다. 자연의 시간에 온전히 함께하는 것은, 본래 자연이었다는 이야기다. 겨울이 길어지면 조직이 더 촘촘하고 단단해진다는 것을 알기에 조급해하지 않았다. 자연의 시간은 언젠가는 봄이 온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혹한의 추위와 바람은 더 성숙해지는 과정의 시간이고, 모든 것을 벗고 눈을 이고 있을 기품 있는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본래면목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기계의 시간에 하루하루 조급해하며 저물어 가는 삶이 아니길, 겨울눈 하나하나를 헤아리고, 쉽사리 가지를 잘라내지 못하는 어리숙한 사람과 함께하는 나무, 명자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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