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점을 찍다
영국에서 점을 찍다
  • 장민정 시인
  • 승인 2023.11.1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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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장민정 시인
장민정 시인

 

전부터 영국은 신사의 나라라 했다. 여왕의 나라이며 `레디 퍼스트'가 일상인 나라! 남존여비 사상에 찌들어 허덕이며 살아온 우리 세대에겐 신선한 충격이어서 꼭 한번 가보고 싶은 동경의 나라이기도 했다. 어쩌다 보니 그런 나라를 구경하는 호사를 다 누리게 되다니, 이래서 세상은 살만한 것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인천 공항에서 오후 2시 50분 발 대한항공으로 암스테르담을 거쳐 런던에 도착한 것은 9시 50분, 12시간 넘게 서쪽으로 날아간 것이다. 도착하여 제일 처음 한 일이 시계를 되돌려 놓는 일, 정확히 7시간 5분을 뒤로 돌리면서 나는 생각 한다. 이렇게 계속 시계를 돌리면 과거의 나를 만날 수 있을까? 과거 속으로 가서 젊은 나를 만날 수 있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할까? 낡고 찌든 내 사상의 못을 갈아입힐 수 있을까, 꿈 같은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영국의 도로는 M자 옆에 1, 2, 3…. 11까지 숫자를 붙여 달팽이처럼 외곽에서 안으로 접어들게 되어 있다. M4 도로 구간이 전형적인 영국의 중산층이 사는 그곳이라고 했다. M4 도로를 달리면서 숲이 많이 우거진 곳, 모든 집들의 창문은 작고 주황색이 들어간 지붕에 굴뚝이 몇 개씩 솟아 있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며 지나친다. 옛날 사진첩에서 본 중세의 풍경 속에 멈추어 있는 것 같다. 한때는 굴뚝의 많고 적음이 빈부의 잣대였다던가? 아직도 그들은 천천히, 느림의 미학 속에 푸욱 빠져 있는 것 같다.

웬만하면 다 밀어버리고 새집을 짓는 우리와는 사뭇 달라 보인다.

길을 지나면서도 부분 수리 중인 여러 집을 볼 수 있었지만, 우리처럼 깡그리 부숴버리고 새로 건축하는 집은 눈에 띄지 않았다.

우리가 집 짓는 데 열중한다면 그들은 집수리에 열중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의 집은 거의 이삼백 년은 다 넘은 것들로 조상이 남겨준 자랑스러운 유산을 지키는 것이 삶의 본질인 양 사는 그들이라서 대개는 많은 사람들이 밀집하여 사는 아파트 따위는 선호하지 않는다.

아파트는 빈민층이 사는 곳이라던가? 값비싼 세금을 내면서까지 굴뚝 있는 옛집을 수리하며 사는 삶을 자랑스러워한단다. 부모 잘 만난 자식들의 여유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모두가 쉬는 연휴에 방영하는 TV프로 중 집수리하는 코너가 그중 인기라니, 아무래도 우리와는 많이 달라 보인다.

코미디 프로에서 보았다던가? 이탈리아 요리사를 고용하고 영국식 정원 넓은 집에서 일본 여자와 정원을 가꾸며 사는 것이 행복한 영국 남자의 꿈이라 하고 반면에 일본식 좁은 집에서 독일 여자와 함께 영국식 요리사를 고용하고 사는 남자는 불행한 남자로 치부한다는 가이드의 우스갯소리마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여왕의 나라, 알게 모르게 여자에게서 폭력을 당하는 남자도 흔하다는 믿기지 않는 얘기도 우리를 즐겁게 한다. 여성 상위의 나라, 세계에서 가장 얇은 요리책을 갖고 있다는 영국 여자들, 알아갈수록 신선한 충격이다.

호텔에서의 아침 식사는 참으로 볼품이 없었다.

JURY INN이라는 런던 근교에 있는 3성 호텔이라는데 딱딱한 빵과 우유, 후르츠, 쓰디쓴 커피 정도, 일행들은 투덜거린다.

한국을 떠나 겨우 사흘째인데 벌써 김치 생각이 절로 나고 보글보글 끓는 구수한 된장 뚝배기가 그립다.

그런 와중에 드는 생각은 침대에서 남편이 타주는 모닝커피를 마시며 아침을 시작한다는 이곳 주부들의 여왕 같은 여유가 낯설지만 그만큼 부럽다.

가족들의 세 끼 식사 준비에 거의 모든 인생을 허비하는 우리나라 주부들과 너무도 차이 나는 여왕의 나라 여자들은 가사에 지쳤다던가, 명절증후군이라던가 하는 말은 알지도 못할 것이다. 나도 여왕의 나라 여인들처럼 대우받으며 한번 살아 봤으면, 마음속에 꾸욱 점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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