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이쾌동
서예가 이쾌동
  • 정인영 사진가
  • 승인 2023.11.09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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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인영 사진가
정인영 사진가

 

“나에게 서예란 명성도 부귀의 추구도 아닌 온전한 내 삶의 진실과 순수의 위함입니다.”
1950년대 중반 충북 중원에서 태어나 운당, 소창다미재, 완이헌이라는 호를 지닌 서예가 이쾌동이 한지의 향연이 서예이며 인간의 교훈과 감성을 담아 가슴으로 연결하는 예술이라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붓으로 글씨 쓰는 습관이 있어 이것저것 쓰던 어느 날 서예의 기초자료가 실린 법첩을 만나 보면서 어마어마한 서예자료에 있는 옛 명필의 글씨들을 보고 서예에 눈을 떴다고 했다. 
그는 서예가 중국에서 발생한 예술형식의 하나로서 한국에 전해내려와 글씨를 쓰는 기술적 측면을 넘어 정신수양의 수단이기에 서도라고 했다. 글씨라는 것이 어디까지나 문자를 떠나거나 붓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에 사람의 손에 의해서 쓰인 문자의 미의식이 겸비된 표현의 서사라고 했다.
대전대학교 서예학과에서 서예이론과 실기를 공부한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예교육기관인 동방연서회에 들어가 근현대사 한국서단의 최고대가로 인정받는 여초 김응현에게 사사하여 본격적인 서예의 길에 들어섰다. 서예를 하는 예술인이 서예가에 그치지 않고 자기작품세계를 제대로 일으켜내기 위한 끊임없는 그의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자신이 지닌 혼이 서린 역정 속에서 차츰 실력을 일구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서예는 1998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나름의 평가를 받았다. 당시 종이를 준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워 전지 2장을 표구사에서 이어붙여 출품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우수상을 받는 쾌거를 올렸다.
2년 후인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구입한 작품도 특이한 서예로 알려졌다. 다른 서예가들과 달리 가로 150cm, 세로 50cm의 종이에 글씨의 줄을 무시한, 자유롭게 쓴 글씨로 중국 왕희지의 아들 왕헌지의 글씨를 서평한 것 중 ‘바다에 큰 고래가 물을 크게 뿜다.’란 내용이다.
한때 전용 서실이 없어 남의 집 창고에서 3년 동안 글씨를 쓰기도 했던 그는 ‘서법 미학사상사’ 를 번역했다. 그리고 서예의 본질에서 출발해 현대적인 서예가치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 온 과정을 철저하게 배제한 작품으로 서울 인사동 백악미술관에서 서법전을 열었다.
그는 또 크고 작은 화폭에 노래와 시를 담아 청주가 지녀야 할 품성과 도덕, 인간의 근본을 담은 작품을 한국공예관에서 전시했다. 한글이 지닌 아름다움은 물론 동양의 세계문자 주역임을 알 수 있게 했으며, 청주예술의전당 1,2층 전관에서 대작 200여점, 소품 40여점을 전시하는 기염을 토했다.
서예는 5체를 모두 쓸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그는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를 골고루 써왔다. 근래에는 주로 행서, 예서, 전서를 형편에 따라 쓰고 있다. 서예가 아름답게 보이는 것만 찾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좀 모자란 듯하면서도 그 안에 진실이 담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전통적인 미학을 우선으로 꼽았다.
청주에서 40여 년 가까이 당호를 딴 허백서회를 이끌어온 그가 질 높고 바람직한 서예교육을 장려하는 등 서예탐구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 흑백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은은한 묵향을 널리 풍기는 서예가로, 삶과 인생이 진하게 배어 있는 전통의 멋을 그대로 보여주는 서예 에세이를 쓸 것이라고 한다. 술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애주가인 그에게서 늘 느끼는 것이 있으니 서예가로서의 붓 활용법, 표현력으로서의 글씨,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는 성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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