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탁발2
덕산탁발2
  • 무각 스님 괴산 청운사 주지
  • 승인 2023.11.09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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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
무각 스님 괴산 청운사 주지
무각 스님 괴산 청운사 주지

 

소나무 보이는 창가에는 종일토록 번잡한 일이 없고
물 돌통은 항상 평온하여 고인물도 맑구나!
다리가 부러진 솥에는 음식도 풍족하니
어찌 명리를 찾고 영화를 구하겠는가?

괴산 청운사 도량은 늦가을의 투명한 단풍이 한창입니다. 이 시간에 탁마할 공안은 단도직입형 공안인 무문관 제13칙 덕산탁발(德山托鉢) 2입니다.

덕산선감(782~865) 선사는 육조혜능(六祖慧能)에 이어 청원행사(靑原行思), 석두희천(石頭希遷), 용담숭신(龍潭崇信)의 법맥을 이은 제자이지요. 금강경에 능통해 특히 성이 주(周)씨라서 주금강(周剛)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용담에 가서 숭신선사를 혼내 주려다가 오히려 절 밑에서 호떡장사를 하는 노파에게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末來心不可得)인데 어디에다 점심(點心)하겠느냐?”는 물음에 막혀 그만 숭신찾아가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서두희천(828~887)은 설봉의존(822~ 908)과 함께 덕산선사의 법을 이은 제자로 설봉 선사는 당시 전좌(典座)로 창고의 책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듯이 불교는 자비를 표방하는 종교입니다. 보통 자비는 불쌍한 사람에게 베푸는 연민이나 동정의 뜻으로 쓰이지만 자비의 정신은 근기에 따른 방편(方便)이란 개념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방편이란 개념은 지금까지 부정적인 뉘앙스로 통용되어 왔습니다.

온전히 어떤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대충 급한 불을 끈다는 식으로 임할 때 우리는 이를 임시방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불교에서 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부정적인 뜻을 내포 하고 있지 않습니다. 방편이란 중생의 수준 즉 근기에 맞추어 이들을 깨달음으로 이끌려고 하는 노력이 바로 방편이라는 겁니다. 바로 방편은 획일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눈높이에 맞춘 수준별 교육이라는 겁니다. 마치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면,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방법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대학교수와 초등학생은 수준이 다릅니다. 당연히 두 사람에게 적용되는 방법은 달라야만 할 겁니다. 그래서 불교에서의 방편이란 눈높이의 교육의 정신이 없다면 아마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제대로 읽으려는 감수성도 없으면서, 어떤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려고 한다면 아마도 그 상대방은 오히려 자비는커녕 마냥 피곤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방편에 정통한 사람은 최소한 두 가지 전제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깨달음의 경지에 스스로 이를 수 있어야 할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깨달음으로 이끌려는 상대, 즉 제자의 수준을 정확히 파악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방편에 정통한 사람은 저 원효 대사도 말씀 하신 것처럼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실현하고 있는 사람, 곧 부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이로움을 실천했기에 자리(自利)이고, 이 깨달음에 타인도 이를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이타(利他)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무문관 제13칙 덕산탁발(德山托鉢) 3.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무문관 공안으로 보는 종횡무진 자유로운 선(禪)과 함께하는 모든 분들이 부디 행복하시고 여여하시길 두 손 모아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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