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흔적
삶의 흔적
  • 김은혜 수필가
  • 승인 2023.11.02 19: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김은혜 수필가
김은혜 수필가

 

늦지 막한 오후 가을 햇살을 받으며 고향 큰 형님 같은 어르신의 병문안을 나섰다.

이분은 구순이 넘으셨다. 그럼에도 노인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강건하신지라 동료들의 부러움을 사셨다. 그런데 얼마 전 낙성하셔서 골반이 부러져 오래도록 병원 신세를 지시다 퇴원하셨단 소식을 듣고 가는 중이다.

산모롱이 둘레 길을 걷는데 만개한 단풍잎 사이로 해가 쏘아본다. 어찌나 그 빛이 영롱한지 눈이 부시다. 참으로 아름답다. 이대로 마냥 걸어야 하지 않겠나 싶을 정도로 마음을 사로잡는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현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고

“저 왔어요.” 목소리를 확인하자 반색한 목소리로 어서 오란다. 방문이 늦어 미안한 마음에 정중히 인사하고 마주 앉아 눈을 맞춘다. 햇빛을 보지 못해 피부색이 빨랫줄에 널어놓은 명주 필묵 같다. 마음이 아리다. 많이 보고 싶었다며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로 풀어놓으신다.

입담은 여전히 줄지 않으셨는데 젊어서 한으로 맺혀있던 매듭이 풀어져 말 속의 뼈가 순화되었다. 그렇게도 자기 집념이 강한 어른인데 어찌 일평생 차곡차곡 쌓아 놓고 기회만 오면 꺼내 보여주던 상처가 아물어 고운 살결로 바뀌었나. 병원은 마음도 치유하는 곳인가 보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하면서도 한편 애잔해 가슴이 뭉클하다.

이 어르신은 계모 손에 자라 어려서부터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고 하셨다. 보통학교에 들어가서도 면서기인 아버지가 출근하면 소사를 시켜 학교에 와 불려 가기가 일쑤였다고 했다.

집에 오면 동생들 돌봄은 물론이고 새엄마 친구들의 시중을 들어야 했다며 눈물을 자주 흘리셨지. 허울 좋은 딸이었지 몸종이었단다. 한으로 맺혀 가까이할 수 없는 선인장 가시처럼 꺼내 보일 때마다 본인도 아프고 듣는 이도 아팠었지. 죽도록 미웠던 사람이 사랑스러워지다니 자신을 비우면 용서 못 할 죄인은 없나 보다. 아프게 했던 과거를 희로애락의 이야기로 풀어놓다니. 얘기가 이어지는 내내 얼굴이 악의가 없는 청순한 어린아이 얼굴처럼 너무나 온유하다. 저 가슴이 얼마나 시원하면 저리도 온순한 모습일까.

숙제를 마치고 돌아오는 발 길인지라 가벼워 수북이 쌓인 낙엽이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낙엽 위에 앉는다. 반기듯 내 무릎 위에 낙엽 하나가 살포시 안긴다.

이 단풍잎은 나무가 내년을 준비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사랑하며 보듬던 잎을, 떨켜를 만들어 놓고 수분을 주지 않아 갈증과 추위와 햇살에 몸은 야위고 빛깔이 변했다. 힘을 다해 붙잡지만 기진해 떨어졌다. 가을이 얼마나 슬픈 계절인가. 그럼에도 인간은 가을을 아름답다 노래한다. 나도 곱게 물든 낙엽이 예뻐 스쳐 지나갈 수 없어 낙엽 위에 앉아 구름 위에 앉으면 이런 기분이겠지 라며 좋아하고 있다. 생각하면 이 단풍잎도 곱게 물들여 낙엽이 되기까지는 숱한 날을 사느라 얼마나 아픈 골이 깊었을까. 삶이란 아픔의 연속이 아닌가 싶다. 봄에 잎눈을 틔워 성장하는 동안 모진 비바람도, 따가운 햇볕도, 곤충의 침범도 삶의 흔적이었다고 말하려나.

나를 한 그루의 나무로 보자. 나무일까, 잎새일까. 나무라면 나만 살겠다고 떨켜를 만들어 놓고 수분을 공급하지 않을 것이고, 잎이라면 오늘을 살기 위해 나뭇가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부짖으려나? 아니, 제 몫을 다하고 내려놓는 이 단풍잎처럼 받은 사랑을 보답하기 위해 자양분이 되는 과정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지. 그리고 저 구순의 어르신처럼 그대가 있었기에 오늘에 내가 존재 했다고 해야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