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조리 내준 나무
모조리 내준 나무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 승인 2023.10.31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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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아침저녁 나절로 온도 차가 크니, 몸이 자연스레 겨울 채비다. 노지 월동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가르고, 수종마다 다른 준비다. 그래서 출근 전 시간은 분주하다. 이리저리 바쁜 발걸음에 묘한 소리가 귓전을 두드린다. 후드득후드득, 뭔가 떨어지는 소리인데, 보이질 않는다. 소리만 들린다. 보이지 않는 비인가? 구름이 낮게 내려 있지만 비구름은 아닌데 말이다.

나무 밑, 반그늘을 좋아하는 고사리류를 밖으로 꺼내는데, 가지 사이마다 잎맥만 앙상한 나뭇잎이 촘촘하게 꽂혀있다. 잎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흉한 모습이다. 새로 나서 이제 자리를 잡은 연약한 가지가 부러질세라 조심스럽게 잎을 꺼낸다. 전년과 같이 멋진 단풍을 기대했건만, 괴상한 애벌레의 습격에 감나무는 초췌한 모습이다. 그나마 달린 잎들이 얼쑹덜쑹하다.

지난해는 높은 하늘에 유유히 지나는 구름 사이로 분주하게 얼굴을 내밀며 햇살을 내려, 바닥이 얼쑹덜쑹했는데 올해는 물든 잎은커녕, 제대로 생긴 잎을 볼 수가 없다.

바람에 나뒹구는 낙엽이 없다. 그래도 어느 나무에서 떨어졌는지 알려주려 앙상하게 남은 잎맥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다. 그러나 마르고 비틀어지고 그나마 불법 주차하는 차의 앞바퀴에 짓이겨졌다. 비질이 어렵다. 힘든 비질에 수북하게 모여졌다. 간신히 모았는데 쏜살같이 지나는 차에 모아놓은 나뭇잎 가루가 차를 따라 흩어진다. 먼지에 잠시 눈을 감았다. 고개는 자연스레 차가 가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눈을 떴다.

몇 움큼이나 될까 묘한 것이 수북하게 남아 있다. 모래알일지 싶었는데, 짙은 초록빛이다. 질석 같기도 한데, 이런! 애벌레의 똥이었다.

그렇구나! 한여름부터 여태 먹어 치웠으니, 남은 것은 똥밖에 없을 터, 온전한 잎 하나 없이 먹어 치웠으니 그간 싸댄 똥은 얼마나 많을까? 눈앞에 애벌레가 기어간다. 이제 먹을 거 없으니 배도 부르겠다 추워지니 겨우내 잠잘 곳을 찾으러 가는 건가? 밟아 죽일까 싶다가도 너도 살려 하는 것인데, 그대로 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본다.

흩어진 나뭇잎 가루를 다시 모으는데 앙상하게 잎맥만 남은 잎자루가 나뭇가지에서 `툭' 떨어진다. 단풍이 들고, 단풍이 지나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전하고, 이제 시간이 다했다는 떨겨의 이별이 아니다. 잎을 모조리 갉아 먹어 더 이상 잎의 역할을 못 하니 떨어지는 것이다.

커다란 트럭이 가지를 치고 가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아침마다 게걸스럽게 먹던 잘 익은 홍시도 `털썩' 바닥으로 떨어져 묵사발이 되었다. 넓은 길 나누고 왜 굳이 나무쪽으로 붙어 간다느냐? 넋 놓고 졸던 멧비둘기가 화들짝 놀라 푸드덕 날아간다.

꽃을 피우고 마카로니 과자처럼 생인 꽃잎을 떨구고, 가지 찢어질라 걱정되어 스스로 열매를 솎아내고, 시도 때도 없이 오르내리는 고양이에게 놀이터가 되어주었는데, 웬 애벌레 하나가 이리 초토화했는가 싶다. 그래 잎 한쪽 정도야 내어 줄 수 있지 싶었는데, 한 그루의 나무를 초토화하고, 옆 나무까지 번져, 그 이쁘던 블루베리 단풍도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더 이상 두었다가는 성한 감 하나 맛볼 수 없을 듯하여 바지랑대를 추켜세웠다. 반 접은 아니어도 이 정도면 겨우내 즐길 만하겠지? 딱딱한 거는 곶감으로 약간 물렁물렁한 거는 홍시로, 쪼아 먹은 몇 개는 까치밥으로, 그렇게 겨울을 그린다.

이제 서리가 내리고 추위가 찾아오면 모조리 벗어버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겠지? 싹을 틔우고 여름내 녹음을 자랑했던 그 자태는 온데간데없이 앙상한 가지만 남겠지? 무겁게 달았던 열매도 내어 주고, 이젠 꺾여있던 가지 끝을 올리겠지?

그런 생각하지 말라. 한겨울 폭설에도 감꼭지에 눈을 소복이 쌓을 것이다. 모든 것을 내어 주고, 원 없이 하늘을 보는 열매를 다는 나무가 되어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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