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산책길에서
가을 산책길에서
  • 연서진 시인
  • 승인 2023.10.31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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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연서진 시인
연서진 시인

 

검진차 들른 병원에서 지난번보다 폐가 좋아졌다는 선생님 말씀에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기관지 확장증을 앓고 처음 듣는 반가운 말이다.

폐에 고여 있는 가래가 모두 사라진 느낌이다. 그동안 마신 물 덕분인 것 같아 집으로 오는 동안 마시는 물이 달디 달았다.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음식 섭취와 물 마시기의 중요성을 들었다. 사람의 몸은 수분이 60~70%로 되어 있어 2%의 수분만 감소해도 피로를 느끼는데 통계상 암 환자들이 마시는 물의 양이 적다고 한다. 따라서 적정량의 물을 잘 마셔야 한다고 했다.

퇴원 후, 먹는 모든 것이 숙제였다. 비상이 걸렸다. 꼭 마셔야 하는 2리터의 물이 난감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2리터가 별것 아니라고 여겼다.

일도 하지 않는데 어려울까 싶었기 때문이다. 저절로 식사량이 줄었다. 콩팥 절제 수술 후 기능이 떨어져 식사량을 줄여야 했다. 연신 물을 마셔야 하니 배가 불러 절로 식사량이 조절되었다. 먹성 좋은 내게 좋은 현상이다.

그동안 화초는 수시로 물주며 보살폈으나 정작 내 몸 돌보는 것엔 소홀했다.

미용사로 일하는 나는 일 특성상 바쁠 땐 시간을 계산해 가며 일한다. 물 마시면 화장실에 자주 가게 되니 기다리는 고객들을 보면 물 마시는 시간도 아껴가며 일하는 게 습관처럼 되었다. 아무도 모를 혼자만의 고객 사랑이었다.

적절하게 잘 마시면 치료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들은 터라 물 마시기에 돌입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미지근한 물을 천천히 마신다. 한 번에 많이 마시려 해도 안 되고 조금씩 수시로 물을 마셔야 하니 식사 1시간 전후로 정해진 양의 물을 마시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날마다 물을 챙겨 현관문을 나선다. 인근 올레길도 걷고 동네를 걷는다. 전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작고 아담한 카페가, 공설 운동장 한쪽에는 언제 생겼는지 흔들 그네도 보인다.

이사 온 지 20년 넘었는데 이제야 동네를 알아가고 있다. 이쪽은 어디로 이어질까? 여기로 가면 또 뭐가 있을까. 걸으면 나타나는 풍경이 보물찾기처럼 흥미롭다.

오늘은 백야리에 있는 저수지 둘레 길을 걷는다.

백야리 오르막길에 줄지어 선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어서 오라고 반겨 주는 것 같다.

가을 색 물씬 묻어난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쏟아진다. 언덕에 올라서니 커다란 호수에 또 하나의 산이 담겼다. 윤슬이 보석처럼 빛나고 바람결에 흔들리는 호수 속의 가을 산, 어느 계절이든 백야는 아름답게 빛난다.

물 마시려 가방을 열어보니 아뿔사, 물이 없다. 그제야 현관에 두고 온 생각에 당황했다. 허둥거리는 버릇은 바쁘지 않은 지금도 여전하다. 석 달이 넘도록 물을 열심히 마셨는데 아직도 챙기는 걸 잊어버리다니, 물 마실 시간이 늘어지겠다. 자다 깨 화장실 갈 생각하니 오늘 밤 숙면은 진즉 물 건너갔다.

이곳에는 상점이 없다. 난감하다. 약처럼 마셔야 하는 물을 두고 나왔으니 별수 없이 왔던 길을 돌아 마트로 간다.

예전 같으면 짜증 내고 자책할 텐데 `조금 더 걸으면 건강에 좋지'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이제 내게 여유가 생겼나 보다.

진단 직후 행복이 문밖으로 모두 달아난 줄만 알았다. 일을 중단하고 산책을 하면서 어쩌면 병에 걸린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마음이다.

파란 하늘이, 푸른 녹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지 못했다. 눈부신 하늘과 머리를 스치는 바람에 가슴이 울렁거린다. 행복을 손에 쥔 줄 모르고 있었다는 걸 아프고 나서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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