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진차 들른 병원에서 지난번보다 폐가 좋아졌다는 선생님 말씀에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기관지 확장증을 앓고 처음 듣는 반가운 말이다.
폐에 고여 있는 가래가 모두 사라진 느낌이다. 그동안 마신 물 덕분인 것 같아 집으로 오는 동안 마시는 물이 달디 달았다.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음식 섭취와 물 마시기의 중요성을 들었다. 사람의 몸은 수분이 60~70%로 되어 있어 2%의 수분만 감소해도 피로를 느끼는데 통계상 암 환자들이 마시는 물의 양이 적다고 한다. 따라서 적정량의 물을 잘 마셔야 한다고 했다.
퇴원 후, 먹는 모든 것이 숙제였다. 비상이 걸렸다. 꼭 마셔야 하는 2리터의 물이 난감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2리터가 별것 아니라고 여겼다.
일도 하지 않는데 어려울까 싶었기 때문이다. 저절로 식사량이 줄었다. 콩팥 절제 수술 후 기능이 떨어져 식사량을 줄여야 했다. 연신 물을 마셔야 하니 배가 불러 절로 식사량이 조절되었다. 먹성 좋은 내게 좋은 현상이다.
그동안 화초는 수시로 물주며 보살폈으나 정작 내 몸 돌보는 것엔 소홀했다.
미용사로 일하는 나는 일 특성상 바쁠 땐 시간을 계산해 가며 일한다. 물 마시면 화장실에 자주 가게 되니 기다리는 고객들을 보면 물 마시는 시간도 아껴가며 일하는 게 습관처럼 되었다. 아무도 모를 혼자만의 고객 사랑이었다.
적절하게 잘 마시면 치료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들은 터라 물 마시기에 돌입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미지근한 물을 천천히 마신다. 한 번에 많이 마시려 해도 안 되고 조금씩 수시로 물을 마셔야 하니 식사 1시간 전후로 정해진 양의 물을 마시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날마다 물을 챙겨 현관문을 나선다. 인근 올레길도 걷고 동네를 걷는다. 전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작고 아담한 카페가, 공설 운동장 한쪽에는 언제 생겼는지 흔들 그네도 보인다.
이사 온 지 20년 넘었는데 이제야 동네를 알아가고 있다. 이쪽은 어디로 이어질까? 여기로 가면 또 뭐가 있을까. 걸으면 나타나는 풍경이 보물찾기처럼 흥미롭다.
오늘은 백야리에 있는 저수지 둘레 길을 걷는다.
백야리 오르막길에 줄지어 선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어서 오라고 반겨 주는 것 같다.
가을 색 물씬 묻어난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쏟아진다. 언덕에 올라서니 커다란 호수에 또 하나의 산이 담겼다. 윤슬이 보석처럼 빛나고 바람결에 흔들리는 호수 속의 가을 산, 어느 계절이든 백야는 아름답게 빛난다.
물 마시려 가방을 열어보니 아뿔사, 물이 없다. 그제야 현관에 두고 온 생각에 당황했다. 허둥거리는 버릇은 바쁘지 않은 지금도 여전하다. 석 달이 넘도록 물을 열심히 마셨는데 아직도 챙기는 걸 잊어버리다니, 물 마실 시간이 늘어지겠다. 자다 깨 화장실 갈 생각하니 오늘 밤 숙면은 진즉 물 건너갔다.
이곳에는 상점이 없다. 난감하다. 약처럼 마셔야 하는 물을 두고 나왔으니 별수 없이 왔던 길을 돌아 마트로 간다.
예전 같으면 짜증 내고 자책할 텐데 `조금 더 걸으면 건강에 좋지'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이제 내게 여유가 생겼나 보다.
진단 직후 행복이 문밖으로 모두 달아난 줄만 알았다. 일을 중단하고 산책을 하면서 어쩌면 병에 걸린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마음이다.
파란 하늘이, 푸른 녹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지 못했다. 눈부신 하늘과 머리를 스치는 바람에 가슴이 울렁거린다. 행복을 손에 쥔 줄 모르고 있었다는 걸 아프고 나서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