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찍는다는 건
사진을 찍는다는 건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3.10.30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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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나날 기쁘게 모델이 된다. 그가 든 카메라에 찍힌 사진 속의 피사체가 기꺼이 되기로 했다. 그이가 홀연히 카메라를 사서 얼떨결에 모델이 되었다. 사진기를 붙안아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제주의 가을을 보고 그냥 지나치기엔 서운하더라는 변명을 풀어 놓는다. 오랜만에 보는 상기된 그이의 모습이 사랑옵다.

사진에 문외한인 나는 피사체의 배치를 잡는 구도가 중요하다고 본다. 제일 기본적인 요소가 아닐까 한다. 전체적으로 조화롭게 해주는 구성이야말로 안정감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가까운 데서 먼 곳으로 이끄는 선이 찍히도록 하는 원근법은 그림과 사진이 같다.

그이에게 청천벽력같은 진단이 내려지던 날이 잊히지 않는다. 잡고 있던 모든 것을 놓아버린 얼빠진 표정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날로부터 전날의 패기 넘치던 그이가 아니었다. 의욕을 다 잃은 한 남자가 있었다. 말없이 하냥 지켜봐 주는 것이 최선이던 나였다. 언젠가 스스로 밀치고 나올 문이 열리기를 소마소마 기다린 시간에 대한 응답을 해왔다.

의사의 말은 아픈 그이에겐 신의 말씀이다. 믿고 따르는 신앙인 셈이다. 며칠 전, 주치의가 하사(賀詞)한 좋은 결과는 내일을 살아갈 기적이 된다. 이 한마디에 그이가 꿈을 품게 되었는가 보다. 드디어 하고 싶은 게 생긴 것이다. 반가워 덥석 손을 잡는다. 꾹 닫고 있던 마음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이제 세상으로 씩씩하게 나서고 있음이다. 기뻐서 흘리는 눈물은 단맛이 난다는 이유를 알겠다.

찰칵! 셔터 누르는 소리가 경쾌하다. 사진을 찍겠노라는 말이 고마울 뿐이다. 초보 사진작가와 어설픈 모델의 접사가 시작된다. 길 위에 서서 단풍과 스러지는 가을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꽃밭의 꽃이 나의 배경이 되어주고 있다. 꽃으로 하여 초라해지는 게 아닌 내가 더 도드라진다. 사진의 마법이 놀랍다. 일취월장한 실력이다.

카메라의 조리개가 빛을 부리는 기술이다. 그 숫자가 작을수록 조리개는 많이 열려서 빛을 크게 받는다. 그러면 주위의 배경이 흐려지고 살리려는 피사체만 살아난다. 사람이나 물체를 선명하게 찍을 때는 조리개의 숫자를 작게 하고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또 풍경 전체를 선명하게 담으려면 숫자를 크게 하면 된다. 렌즈를 통해 빛을 잘 조절해야만 좋은 사진이 되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명화를 보다가 당황한 적이 있다. 바로크 미술의 거장인 루벤스의 “키몬과 페로”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젊은 여인이 가슴을 드러내고 있고 검은 수의를 입은 한 노인은 여인의 젖을 물고 있다. 감옥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아버지 앞에서 해산한지 얼마 안 된 딸이 가슴을 풀어 젖을 물리고 있는 모습이다. 속을 모르는 사람들은 외설이라고 비난을 한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진실을 아는 이들은 그림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나중에 본질을 알고 다시 본 그림 앞에서 나는 한없이 숙연해졌다.

한 장의 그림과 사진은 마음을 울릴 때가 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과 순간이 담긴 사진은 때로는 한 권의 책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이나 추억이 고스란히 스며있기도 하다. 겨울을 견뎌 생명을 피우고 봉오리를 맺어 그 존재를 드러내는 꽃의 시간이 온전히 담긴다.

나는 기대한다. 그이는 멋진 사진작가가 될 것을. 잘 찍은 사진보다 그 안에 스며있는 이야기를 담을 줄 아는 사람.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이면을 담아내는 사람. 아파서 홀로가 되어 본 그이기에 셔터를 누를 때마다 한 편의 시가 되어 외로운 이들을 위로해 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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