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을 품은 옛이야기
이상을 품은 옛이야기
  •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 승인 2023.10.26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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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그릇에 담긴 우리 이야기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작가는 자기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세상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작가의 눈이 어디에 무엇을 향해 있는지에 따라 작품에 녹아 들어간 알맹이가 다른 이유다. … 수없이 많은 사람의 입을 거치면서 현재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옛이야기의 작가는 잘나고 못난 것 없는 평범한 우리 이웃이다. … 시공간을 넘어 정제된 `이야기' 고유의 힘으로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훌륭한 문학의 힘을 갖게 되었다.' <그림책의 이해 중>

날이 쌀쌀해지고 있다. 겨울이 오고 있다. 나만의 월동준비를 위해 가을이면 미리 준비하는 것이 있다. 장갑이다. 가죽, 면 등 소재가 분분하지만 그래도 털로 짠 장갑이 최고다. 털실이 주는 포근함은 추운 날, 간단한 소품만으로도 몸과 마음을 그리고 보는 이로 하여금 따듯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노소 불문하고 예나 지금이나 애용하는 이유다.

어린이 문학에서도 장갑을 소재로 한 책이 여럿 있다. 그 중 <장갑/에우게니 M. 라쵸프 그림/한림출판>이란 제목의 그림책이 있다. 우크라이나 민화다. 강아지와 함께 숲속을 걸어가던 할아버지, 장갑 한 짝을 떨어뜨린 것도 모른 채 그대로 걸어간다. 그러자 먹보 생쥐, 팔짝팔짝 개구리, 빠른 발 토끼, 멋쟁이 여우, 잿빛 늑대, 송곳니 멧돼지, 느림보 곰이 차례로 장갑을 발견한다. 그들은 먹을 것을 찾기도, 그냥 지나가기도, 잠을 청할 따듯한 곳을 찾는 등 가지각색의 사연을 품고 있다.

장갑을 발견한 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물론 모두 장갑을 보금자리로 삼고 싶어 한다. 장갑 속의 거주자들은 하나가 둘이 되고 셋이 되고 여섯까지 된다. 할아버지의 평범한 엄지 장갑에 작은 생쥐부터 덩치가 커다란 곰까지 들어가다니! 물론 판타지가 섞인 옛이야기이니 가능하다. 먼저 들어간 작은 동물들은 “나도 장갑에 들어가게 해 줘!”라며 청하는 동물들을 포악하든 크든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단, `들어오라고 해도 될까?' `이렇게 좁은데 어디로 들어오려고?'라며 고민은 한다. 그래도 그들은 어떻게든 해 보며 `장갑집'에서 함께 머무른다. 편치 않은 불편한 집이지만 그들은 더불어 사는 것을 택한다.

터질듯한 엄지 장갑 속 좁디좁은 공간임에도 종이 다르고 크기도 다른 포식자 관계에 있는 동물들이 함께 지낸다는 것은 심히 이상적인 이야기다. 수백 년 전해 내려오며 정제된 옛이야기이기에 가능하다. 글 텍스트인 옛이야기로만 보면 계절적 배경은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개구리와 곰이 등장하니 겨울은 아닐 것이라 짐작만 해 본다. 그러나 화가인 에우게니 M. 라쵸프는 `눈 내리는 추운 겨울 숲'이라는 과감한 설정으로 독자들의 공감을 끌어낸다. 배고프고 추운 겨울이라는 악조건의 환경은 이상을 현실로 끌어들이는 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역할을 한다.

문학의 힘이라 본다. 옛이야기에 그림이 더해졌을 때 불어나는 힘이다. 여전히 나누고 이웃과 함께하며 사는 이들도 많다. 그렇게 하지 못하고 사는 나로서 위대해 보이는 이들이다. 마음과 뜻은 품고 있으나 선뜻 나서지 못하고 경계에 서 있는 이들, 경계선 밖에 있으며 바라만 보고 있는 이들도 있다. 이상을 현실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을 때 문학은 조금씩 힘을 준다.

그림책 <장갑> 속 동물들이 누군가가 청할 때 고민하고 들어주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상적인 상황을 보며 한 발 내딛는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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